풍수지리/풍수지리

李秉喆·具仁會·趙洪濟 생가와 선영

오늘의 쉼터 2008. 6. 4. 12:04
智異山과 南江의 조화가 낳은 吉地

 삼성그룹의 2005년 매출 총액은 144조3510억원(1400억 달러)이었다.

41개 계열사 종업원 22만9000명이 이루어 낸 성과이다.
 
  같은 해 LG그룹은 子회사 30개社 임직원 14만3000여 명이 84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효성그룹은 4조8590억원이었다.
 
  삼성에서 떨어져 나간 신세계·한솔·CJ그룹, LG에서 분리된 GS그룹의 9개社(자산 2조4000억원), 그리고 창업주의 아들 3형제가 각각 분할한 효성그룹의 또 다른 기업군들을 숫자에 넣지 않고도 이 3개 그룹이 2005년 한 해에 올린 매출 실적만 233조원에 이른다.
 
  2007년 대한민국 국가예산 238조원(국회 통과 이전의 정부안)과 맞먹는 수치다. 이 3개 그룹의 2007년 매출 목표는 300조원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실제로 대한민국 국가예산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3개 그룹에서 고용하고 있는 임직원만 줄잡아 40만 명, 그 가족들을 합하면 2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이 세 기업을 통해 먹고 살고 있다. 게다가 수직·수평으로 연결된 협력기업들을 합치면 국민의 절반 정도가 이 3개 그룹과 직·간접으로 생계가 이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 1910~1987), LG그룹의 창업주 蓮庵 具仁會(연암 구인회 1907~1969), 효성그룹의 창업주 晩愚 趙洪濟(만우 조홍제 1906~1984)는 절망적이던 일제 초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智水普通學校의 친구들
 

李秉喆 三星 회장

  李秉喆, 具仁會, 趙洪濟 세 사람이 태어난 慶南 宜寧郡 正谷面 中橋里와 晉陽郡 智水面 勝內里, 그리고 咸安郡 郡北面 東村里 新昌洞은 서부 경남의 3개 郡(군)이 南江을 끼고 연결되는 접점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집안끼리는 서로 상대를 잘 알고 지낼 정도였다.
 
  이 세 사람 중 具仁會와 李秉喆은 진양군(현재 진주시로 편입) 승내리(옛 승산리)에 있는 智水보통학교를 같이 다닌 동문수학의 벗이다. 지금까지 李秉喆·具仁會·趙洪濟 세 사람이 모두 지수보통학교를 함께 다녔다는 것이 통설처럼 회자되어 왔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趙洪濟는 지수보통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다.
 
  승산리 출신인 具仁會가 지수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李秉喆이 의령군에서 진양군의 학교로 들어간 것은 뜻밖이었다. 향리인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서당에 다니던 李秉喆은 1922년 3월 둘째 누이가 살던 진양군 지수면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누이 집에서 숙식하며 보통학교를 다니는 일종의 유학이었다.
 
  의령읍 내에도 보통학교가 있었으나 굳이 지수로 보낸 것은 『기왕 객지로 보낼 바에야 사고무친한 객지에 보내는 것보다는 누님 집이 있는 지수에 보내는 것이 마음 놓인다는 어른들의 배려 때문이었다』고 李秉喆은 밝히고 있다(「財界回顧」, 한국일보사).
 
李秉喆 회장의 生家(왼쪽)와 선친의 묘.

 
  李秉喆이 제일 먼저 上京
 
具仁會 LG 회장

  지수보통학교가 있는 승내리(승산리)에서 태어나 역시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던 具仁會는 李秉喆보다 한 해 앞서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학했다. 두 사람은 1922년 같은 반에서 책상을 맞대고 공부했다. 그러나 李秉喆이 먼저 서울로 떠났다. 지수보통학교를 채 1년도 다니지 못하고 그해 9월 외가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具仁會는 3년 뒤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세 사람 중 신식학교 입학이 가장 늦었던 사람은 趙洪濟였다. 엄격한 가풍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던 그는 17세가 되어서야 서울의 중동학교 초등과와 협성실업학교를 속성으로 거친 다음 19세에 중앙고보에 들어갔다. 그러니 『삼성·금성·효성의 창립자 세 사람이 나란히 지수보통학교를 다녔다』는 전설 같은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세 사람이 지수보통학교를 같이 다녔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세 사람이 태어난 서부 경남의 물과 바람이 어쨌기에 같은 시기에 세 사람의 걸출한 인물들이 세상에 나와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키고 발전시켰던 것일까.
 
  의령군·진양군·함안군 모두 智異山의 동쪽 자락에 南江을 끼고 펼쳐진 고을이다. 백두산의 기맥이 南으로 흘러 뭉친 곳이라는 뜻으로 頭流山(두류산)이라고도 불리는 지리산은 소백산맥으로 흘러온 기맥이 불끈 주먹처럼 강한 기상으로 뭉쳐진 형상이다. 한국의 3大 명산으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3개道에 걸쳐 넉넉하고 깊은 자락을 펼치면서 골짜기마다 문화를 꽃피우고 인재를 배출했다.
 
具仁會 회장의 生家(왼쪽)과 선친의 묘.


 
  세 사람의 공통점
 
  산이 힘찬 기상을 감추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형상을 龍(용)이라 한다. 용은 물을 만나면 멈춘다. 背山臨水地(배산임수지)에 명당이 많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리산의 來龍이 南江을 만나 강한 氣(기)가 곳곳에 穴(혈)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서부 경남 일대의 풍수지리학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이라 하여 모두 재벌이 되고 거상이 되었던가? 그건 아니다.
 
  세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치욕의 韓日합방을 전후하여 태어난 연대가 비슷하다.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책에 따라 신식학교가 생겨나자 한학을 접고 신학문에 뛰어든 점, 즉 개화의 물결을 탄 점이 또한 비슷했다. 그리고 세 사람을 탄생시키고 길러낸 선대의 가문이 지방에서 토호라 일컬어지는 부잣집, 즉 토지자본가이거나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은 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가였다는 점이 공통으로 발견된다.
 
  구한말에서 일제 초기에 이르는 격변의 시기에 한국의 토지자본은 해체되어 갔다. 전국 방방곡곡마다 『내 땅 밟지 않고 걷지 않는다』는 지주들이 있었다. 이 지주계급의 대부분은 일제시대라는 문화적 충격을 받아 소멸되어 갔으나 개중 일부는 토지자본을 상업자본으로, 다시 이를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 성공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위 세 사람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금성사 창업주 蓮庵의 출생지]
 
전형적인 풍수모델의 모습. 굵은 선은 등고선을, 가늘고 짙은 선은 하천을 표시한다. 尾砂(미사)는 산자락, 案山(안산)은 앞산, 祖山(조산)은 멀리 보이는 뒷산을 뜻한다. 보통 氣가 모이는 穴부근의 명당에 집이나 묘지를 쓰게 된다.

  금성사(현재의 LG그룹) 창업주인 蓮庵 具仁會는 1907년생, 진주시 지수면 소재지인 승내리(옛 승산리)가 출생지이다. 이곳은 배산임수가 이상적으로 배치된 지형으로 「천석꾼 30명이 났다」는 곳이다. 음택(조상의 무덤)도 그렇지만 특히 양택(집)은 案山이 길흉과 사람의 운명을 크게 좌우한다. 승내리가 부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마을 왼쪽으로 돌출한 산의 지세 때문으로 보인다.
 
  具仁會의 어릴 때 이름은 丁得(정득)으로 할아버지는 대과에 급제하여 弘文館 侍讀官(홍문관 시독관)이었던 晩海 具然鎬(만해 구연호)였는데 고종이 폐위되자 향리로 돌아와 있었다. 具仁會는 이 할아버지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具再書(구재서), 어머니는 晉陽 河氏(진양 하씨)였다.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金海 許氏(김해 허씨) 집안의 딸과 결혼했는데 선비 집안과 만석꾼 집안의 결합이었다. 이후 2004년 LG그룹과 GS그룹이 경영분리될 때까지 具氏와 許氏의 사돈 집안이 기적이라 할 정도로 평화롭게 기업을 공동경영해 온 것은 한국 재계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은 너무 복잡하다. 요즘의 생명과학은 DNA의 분석을 통하여 사람이 언제 무슨 병을 얻게 될지, 그리고 수명이 얼마인지 등 옛날 같으면 점쟁이들의 영역이었던 문제까지 족집게처럼 알아내고 그 처방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DNA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사주와 조상의 음택과 태어나 자란 양택 등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차 100년쯤 뒤의 생명과학은 「사주와 DNA 결정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사주가 인간의 힘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주어진」 것이라면 조상의 음택과 주거공간으로서의 양택은 덕행과 의지에 의해 어느 정도 고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사주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횡액을 면하고 길한 일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蓮庵 具仁會가 태어나 자란 집은 승내리의 한가운데를 꿰어 흐르는 개천을 끼고 산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LG그룹과 具氏 집안에서 잘 관리하고 계속하여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으나 대체로 옛 모습을 간직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蓮庵이 태어나 자란 집은 동향으로 앉아 마을 전체가 명당인 승내리에서 氣가 가장 강하게 뭉쳐 있는 곳이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쾌방산(일명 벼랑바위) 중턱에는 선비 집안인 具氏 가문을 재벌로 발복하게 한 蓮庵의 할아버지 具然鎬의 묘가 있었다. 가운데 묘가 「通訓大夫弘文館侍讀晩海具公之墓」였고, 좌우에 부인의 묘를 배치하여 3基(기)가 나란히 있었는데 가운데 晩海의 묘에서 강한 地氣가 발생했다.
 
  이 묘는 좌청룡이 안산을 이루면서 앞을 감싸고, 발 아래 흐르는 개천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갔으며, 멀리 남강이 휘돌아 가는 형세여서 재력운이 좋은 묘터였다. 다만 재력운은 아들들에게 발복할 뿐 딸들과는 무관한 운세였다.
 
  「명당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경험칙에 따라 주위를 살펴보니 具然鎬의 묘 위쪽 20m 정도 지점에 아래의 무덤보다 더 좋은 眞穴(진혈)이 있었다. 「명당은 숨겨라」는 교훈을 의식한 탓일까. 具氏들은 이 발복의 근원지를 요란하게 치장하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수수하게 가꾸어 놓았다.
 
  필자는 얼마 전 모 병원 경영자 가족의 요청에 따라 그가 매입한 서울 한남동의 집을 보러 간 일이 있었다. 보수공사를 하기 전 풍수지리에 맞게 설계를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 집에서 문득 바라보니 이웃한 집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집은 아주 크게 잘 지었는데 남향 집에 서향으로 문을 내놓고 있었다.
 
  『저게 뉘 집인지 모르지만 人災(인재)가 날 집입니다. 젊은 사람에게 흉사가 있을 거요』
 
  듣고 있던 집주인 할머니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바로 그 집의 젊은 아들이 얼마 전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조가 그 집의 구조와 비슷(남향집에 서향 대문)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했다. 필자는 대문의 向(향)을 조정해 주었다.
 
  『사주가 나쁘고 조상의 음택이 좋지 않더라도 최소한 살고 있는 집만 좋으면 人災는 면한다』는 것은 풍수지리의 오랜 상식이다.
 
 
  [向이 좋고 편안한 趙洪濟의 生家]
 
趙洪濟 효성그룹 회장

  함안군 군북면 면소재지인 덕대리에서 2km 정도 가면 동촌리 신창동이라는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의 뒤편 논벌 가운데 규모가 큰 옛 문벌 집안의 舊屋(구옥)이 나타난다. 집 앞에는 수백 년 된 향나무가 이 집안의 깊은 뿌리를 말해 주고 있었고, 뒤뜰에는 우람하게 늙은 은행나무가 긴 세월 저편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저택의 어디를 봐도 사람의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효성그룹 창업자 趙洪濟의 생가」로 보존되고 있을 뿐이었다.
 
  집안을 샅샅이 살펴봐도 氣가 살아 있는 혈맥은 감지되지 않았다. 다만 向이 좋고, 집안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양이 또한 준수하여 보기에 편안했다. 집안에서 발생하는 氣보다 집을 멀리 둘러싼 산세의 편안함이 開天運(개천운)의 동력이었다.
 
  물이 집 앞으로 흘러오니 財運이 있는 명당임은 분명하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집의 뒤가 틔어 있는 점이었다.
 
  신창동의 趙洪濟 생가에서 멀리 바라보이던 그 편안한 산은 趙洪濟의 선친이 묻혀 있는 묘소에서도 안산으로 다가와 있었다. 풍수학에서 묘소 뒤에 있는 산은 높을수록 좋으나 앞산은 너무 높으면 좋지 않다고 본다. 趙氏 선친 묘소에서 바라보이는 안산은 너무 높은 편이어서 「큰소리 치는」 권력을 잡기는 어렵고 다만 財運만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묘소는 잘 관리되어 있어 趙氏 문중의 선산에 대한 경외심을 반영하고 있었다.
 
  趙氏 선산에서 「명당 주변에 또 다른 명당이 있다」는 풍수의 상식이 입증되었다. 묘역 근처 감나무밭 뒤편에 氣가 살아 있는 진혈이 있었는데 趙氏들이 이 자리에 묘를 썼더라면 효성의 오늘이 어땠을까. 풍수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명당은 곧 국가적 자산」이라는 차원에서 마음속에 진한 아쉬움이 떠오른다.
 
趙洪濟 회장의 生家(왼쪽)과 선친의 묘.

 
  [臥牛型의 李秉喆 生家]
 
  趙洪濟의 생가에서 멀지 않은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삼성그룹 창업자 湖巖 李秉喆의 생가는 문외한도 한눈에 「명당이다」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집을 둘러싸고 있는 뒷산의 형세와 집 뒤란으로 힘차게 내려오다 멈춘 암벽, 그리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안산의 배치가 모두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이른바 臥牛型(와우형)의 석벽 뒤로 산이 감싸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대문에서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이어지는 구조는 전통 가옥의 구조와 별다른 것이 없었으나 안방으로 氣가 지나가고 있었다. 집은 서남향에 서남향으로 문이 나 있는 구조였다. 일반적으로 서남향의 문은 금기로 돼 있으나 집 자체가 서남향일 경우에는 예외이다.
 
  몇 해 전 이 지역을 강타한 홍수가 주변의 흙벽을 할퀴고 지나간 자국이 마을 전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나 湖巖 생가에는 수마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즉시 보수작업을 했기 때문이리라.
 
 
  수수한 선대의 묘소
 
  李秉喆을 李秉喆이게 만든 조상의 무덤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여러 풍설이 있어 왔으나 필자는 의령군 유곡면 마무리의 마두산 중턱에 있는 증조모 光山 金氏(광산 김씨)의 묘를 발복의 근원지로 확신한다. 정곡면에 이웃한 유곡면 마무리의 마두산에서 湖巖의 증조모 光山 金氏의 묘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마을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길이 끊어지고 사람들의 발길이 만들어 놓은 작은 오솔길이 산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잡초가 엉겨 있고 나무가 빽빽하여 자주 끊어지는 산길이었다. 그런 길을 반 시간가량 올라가서야 숨은 듯 소나무 숲에 가려져 있는 光山 金氏의 묘소가 나타나는데, 묘소 부근에 가서야 겨우 길을 조금 다듬어 놓은 흔적이 있었다. 삼성그룹 창업자 선대의 묘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모습이었다.
 
  묘소도 수수한 옛 모습 그대로였다. 李氏家의 풍수에 대한 식견을 엿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光山 金氏의 묘소 바로 위에는 이름 없는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湖巖家에서는 이 무덤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존치해 두고 있었다. 氣를 살펴보니 光山 金氏의 묘소는 강한 氣가 뭉쳐 있는 명당이었고, 그 위에 있는 다른 무덤은 수맥 위에 있었다. 진혈과 수맥이 한 치의 오차로 엇갈리는 현상이었다.
 
  앞의 골짜기 물이 내 앞으로 들어와 뒤로 나가니 國富運(국부운)이 분명했다. 내친김에 마두산을 속속들이 답사했다. 光山 金氏 묘소 부근에 湖巖의 증조부 묘소로 추정되는 묘소가 있었으나 이 무덤은 명당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증조부 묘의 바로 옆에 大穴(대혈)이 있었다. 흐르는 맥이 스스로 穴을 감싸는 형국이니 이 자리에 썼더라면 삼성의 오늘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산의 정상 부근에는 「천하 명당」으로 꼽히는 十字脈이 한 군데 있었다. 두 가닥의 기맥이 교차하는 특별한 진혈로서 그 기운이 아래로 흘러 光山 金氏의 묘소에 이르러 응축되면서 세계적 재벌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마두산의 우측 능선의 結咽處(결인처) 앞에 기막힌 명당 자리가 또 있었다.
 
  마두산은 묘 자리 하나 만들기 위해 산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내룡이 어떻게 꿈틀거렸는지, 그리고 하늘이 무엇을 감추어 두었다가 어떻게 발현하고 또 어떤 것을 끝내 감추었는지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명당의 학습지였다.
 
 
  관상과 사주에 식견 지닌 湖巖
 
  湖巖은 사주와 풍수의 大家(대가)였다.
 
  『나의 부친도 조부의 피를 받아서인지 언제나 학자·詩人·풍수가들과의 談論風發(담론풍발)을 즐겨 했다』(「財界回顧」)
 
  스스로 밝힌 그대로 그의 조부와 부친은 풍수에 조예가 깊었고, 湖巖 역시 선대의 영향을 받아 사주와 관상, 풍수에 깊은 관심과 웬만한 전문가 이상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湖巖이 경영자로서 대성공을 이룬 비결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밝혀질 일이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다른 경영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湖巖 특유의 용인술을 들자면 「疑人勿用 用人勿疑(의인물용 용인물의)」로 압축된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의심이 가는 인물과 믿음이 가는 인물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사주와 관상이 그 척도가 된다.
 
  湖巖의 생존시에 『삼성그룹의 신입사원 채용 면접시험에는 李秉喆 회장이 관상의 大家를 모셔 놓고 관상을 본다』거나 『李秉喆 회장 스스로 관상을 보고 사원을 뽑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선천적 소질 내지는 능력에 60%를 두고 교육에 40%를 둔다.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아무나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따로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나는 채용 기준에 있어 학점에 50점, 인물에 50점씩 배정한다. 내일의 사장감, 부장감이 될 수 있는 사원의 자질이란 학력이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자질은 어디까지나 원만하고 성실한 성품에 있다. 이래서 나는 신입사원의 면접시험에는 제만사하고 참석하도록 하고 있다』
 
  湖巖이 신입사원 면접시험에 직접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면접에서 가장 우선으로 본 것은 그 사람의 학력이 어떻고 얼마나 똑똑한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이었다는 것은 확인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품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湖巖은 「외모만 보아도 그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의 내면 성품을 알 만한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결국 관상과 사주에 대한 특별한 식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湖巖은 그런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四柱·觀相·風水와 기업 경영
 
  거대한 사업을 벌이는 사람은 땅을 살피고 미래의 형세를 파악하는 데 특이한 안목을 지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그런 안목을 지닌 사람의 조력을 얻어야 할 것인데, 그 또한 쉽지 않다. 옥석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湖巖이 용인 자연농원(現 에버랜드)을 만들 때 많은 풍수를 동원했던 일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湖巖 이후 추진된 부산의 삼성자동차 공장 건설사업은 삼성의 흔하지 않은 대형 실패사업으로 꼽히는데, 과연 湖巖이 관여했다면 그 갯벌에 자동차 공장 건설을 추진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湖巖 자신이 적몰 후 누워 있는 용인 에버랜드 내의 묘소는 명당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뿐 아니라 많은 풍수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湖巖이 왜 그곳에 자신의 유택을 정했을까. 에버랜드 전체를 명당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키려는 염원에서였을까? 아니면 湖巖이 지니고 있던 풍수 상식의 한계였을까? 湖巖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