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풍수지리

명동성당의 유래

오늘의 쉼터 2008. 5. 26. 12:16

 

◎현대사 시련 함께한 민주주의 성지

 

국내 첫 순교자인 김범우 생가터에 건립/이완용 저격계기 정치사의 중심무대로 서울시 중구 명동 2번지에

자리잡은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인들의 「신앙의 중심지」로,우리 국민들에게는 현대사의 고뇌와 아픔을

함께 해 온 「민주주의의 성지」로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사적 제2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고종29년인 1892년에 착공,6년간의 공사끝에 완공됐는데 건축 당시부터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붉은 벽돌을 사용한 고딕양식의 연화조 건물로 화제를 모았다.

 

원래 「종현」이라 불리던 이곳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당이 들어서게 된 것은 국내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김범우(1787년 순교)의 생가터인데다 서울시내 중심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

 

1882년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이던 프랑스인 블랑주교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국내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될 것으로 판단,그보다 90여년 전부터 이승훈을 비롯,정약용의 형제들인 정약전 정약종등과

함께 종교집회를 가졌던 김범우의 집터를 매입하고 1892년 5월 성전기공식을 가졌다.

 

당시 국내 사정상 양옥 건축가가 전무했던 까닭에 벽돌공과 미장공 목수등은 중국에서 데려왔으며 설계와

감독은 국내에서 전도사업을 펼치던 코스트 신부가 맡았다. 또 이곳에 쓰인 벽돌은 병인박해때 9명의

프랑스선교사와 8천여명의 교인들이 처형된 천주교 성지로 잘 알려진 한강변 새남터에서 흙을 퍼다가

사용했다.

 

천주교인들의 정상과 기대속에 공사가 시작된 명동성당은 이곳이 역대 조선왕조의 어전을 모신 영희전과

거리가 가까워 서양인들로부터 풍수침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공사를 저지하는등 갖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착공 6년만인 1898년 5월29일 천주교의 행사인 성심강림대축일을 맞아 3천여명의 신자와 조정의 각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뮈텔주교의 집전으로 성대한 준공식이 열렸다. 건립당시엔 이곳의 지명을 따

「종현성당」이라 불렸으나 광복후 이 일대가 명동으로 편입되면서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939년 문화관이 준공되고 1947년과 73년 사제관과 교육관등 부속건물이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유서깊은 명동성당은 축성식 이후 「뾰족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져 이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줄을 이어 장안의 명물로 부상했으나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한 우리의 현대사를 대변하는 건물로

또다른 자리매김이 시작됐다.

 

1909년 12월 이재명의사가 벨기에 황제 레오돌프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던 이완용을 저격한 것을

시작으로 명동성당은 정치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했으며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에 병영시설로 징발당하고

성당지하에 있는 순교자묘역이 수색당하는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또 명동성당은 그후 조국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주인사들의 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75년 2월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거부운동」을 비롯,이듬해인 76년 3월1일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돼 문정현신부등 7명의 사제와 함석헌,김대중씨등

민주인사 18명이 구속되는 시련을 명동성당은 지켜봐야 했다.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를 기점으로 「6월항쟁」으로 명명된 민주화의 불길이

번지면서 명동성당은 「시위 1번지」로 변모하기도 했다. 민주화 요구가 거셌던 87년에는 한햇동안 무려

1백27차례에 걸쳐 연인원 6만1천여명이 이곳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하룻동안 전교조,노점상연합회,철거민,

전대협등 여러단체의 집회가 잇따라 열리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 치외법권지역으로 여겨지기도 한 이곳은 시위로 인한 수배자들의 은신처 역할도 담당했다.

87년부터 5∼6년간 명동성당은 은은한 평화의 종소리보다 민주화와 자유를 외치는 구호소리가 더 크게

울려퍼졌고 연인들의 산책하는 못브보다는 머리띠를 두른 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더 자주 눈에 띄었다.

 

이처럼 흰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고 짚신을 끌면서 종교의 자유를 꿈꾸던 천주교 신도들의 갈망으로

모습을 드러낸 명동성당은 수난의 현대사를 함께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고색 창연하게 우리앞에 서 있다.

 

<유영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