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뿌리찿기

숭혜전(崇惠殿)의 창시(創始)와 연혁(沿革)

오늘의 쉼터 2008. 5. 16. 11:28

  

    숭혜전(崇惠殿)의 창시(創始)와 연혁(沿革)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양국한 후에 옛 도읍의 유민들이 왕께서 백성에게 베푼 덕의를 사모하여 월성에

사당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매양 명절에는 고을의 아전이 삼반관속(三班官屬)을 이끌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는 초나라 사람들이 일간모옥(띠로 지붕을 이은집)에서 초나라 소왕(昭王)에게 제사지낸 의에서 나온 것이다.

불행히 임진왜란에 묘우가 불탔으며 그후부터는 제향올리는 의식을 화상(畵像)으로서 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위패로서 봉행하였다.

 

천계(天啓) 7년(인조5년 1672년) 정묘에 후손 김시양이 경주부윤으로서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중건하기를 계청(임금에게 아뢰어 청함)하였으며 본부의 유생 김성원 등으로 더불어 경주부의 동쪽 5리쯤 되는 금학산 아래 동천촌에 터를 잡고 사당을 옮겨 일신하게 중건하였다.
그리고 참봉 1인을 두어 제향을 받들게 하였고(예조에서 차출하였음) 또 노비의 전지를 설치했으며,

제전(祭奠)은 관에서 담당하여 변. 두(대와 나무로 만든 제기) 각 7기로 한정하였다.

그후 97년째 되는 경종 3년(1723년) 계묘에 본도감사 조태억(趙泰億)이 순행하다가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장계(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청원하여 특히 경순왕 전호(殿號)의 선액(임금이 내린 선호)을 받았으며 요미(料米)와 말먹이는 콩도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었고 유생51인과 수호군 20인과 전졸 6명을 두었다.

정조 18년(1794년) 갑인에 정전 후면에 사태가 떨어지는 환난으로서 참봉 김건항(金健恒)이 궐문에 호소하였고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림으로써 특히 이건(李建)하라는 분부를 받들어 본도 감사 조진택(趙鎭宅)으로 하여금 터를 잡아 계문(啓聞:임금에게 아룀)하게 하였으며(곧 황남성) 본부윤 송전은 기일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였다.

또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에게 분부를 내려 왕의 화상을 다시 본뜨게 하였다.

왕이 일찍이 영천 불당의 후면 감실(위패나 영정을 모시는 방)에 간직했다가 본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그후 17년 만에 본전을 이건하였고 화상도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빛깔이 변했으므로 이분부가 있게 되었다.

 

5월 18일 역사를 제시작하여 3개월 만에 낙성하여

[ 묘우(廟宇)가 오가삼간(五架三間)이요 내외 신문(神門)이 각 3칸이며 동서재가 각 4칸이요 가관방(假官房)이 삼칸이며 제기고(祭器庫)와 주장고(酒醬庫)가 각 1칸이요 고사(庫舍)가 2칸이며 공수(公須)가 2칸이요 주(廚)가 1칸이며 대문이 1칸이요 좌우내문이 2칸이며 마구(馬廐)가 2칸이었다.]

 

준공을 고하매 임금께서 친히 축문을 짓고 향을 내렸으며 8월초 10일 황남전에 봉안하였다.

(위판은 정당의 당중에 모시고 영정은 정당의 후벽 감실에 모셨음.)

다시 예조에 분부를 내려 규식(規式)을 정하게 했으니,

유생과 전졸은 각각 90여인이요 수호군 1백여명과 양정(良丁) 20명과 하전(下典) 60명을 두었으며 호세는 오결(일결은 열 묶음)을 면제하게 하였고 참봉은 이조로부터 직첩을 내렸다.

(또 가관 1인을 두어 참봉이 유고할 때에는 분향을 대행하게 하였음.)

요미는 날마다 일석14두요 마태(馬太)는 10두이며 또 백미 262석을 하사하여 공장의 식량 및 공역의 용도에 충당하게 하였고(공장의 식량이 43석이요 공역의 용도가 219석이었음.) 무릇 공비(公費)가 10만8천6전 남짓하였다.(성손이 4만3천6백전을 기증하였고 참봉 김성휴가 만전을 희사하여 공역을 준공하여음.)


정조 4년(1780년) 경자에 부윤 김효대(金孝大)가 동천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로서 소청(疏請)하여 곧 윤허(임금이 허락하심)는 얻었으나 공역을 갖추지 못한 때문에 분부가 내린 후 35년째되는 갑술년(순조14년 1814년)에 이르러 황남전 정문 밖에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순조 3년(1803년) 계해년에 계림에 유허비를 세웠다. 신도비각은 1동 8면으로 되어 심히 치려하고 웅장했으며, 유허비각도 또한 이 제도를 모방했으나 규모가 작았다.


고종 24젼(1887년) 정해년 정언 김만제가 미추왕과 경순왕을 병향(幷享)하는 일과 전호를 소청하였고, 판부사 김홍집이 경연(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문무왕을 병향하는 일로서 진청하여 윤허를 받앗다.

 

이에 특히 본부윤 김철회에게 분부하여 묘우를 중건했으니,

오가오간(五架五間)이요 (동서재와 방과 곳간은 모두 잉구하였고 별달리 향축실 1칸을 사당 좌편에 건조하였음) 숭혜전의 선액(宣額)을 내렸으며 3왕의 위패를 만들고 경순왕의 영정을 다시 본떠서 무자년 8월초 10일을 택하여 변 8기와 두(豆) 8기를 갖추고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보내어 고유하고 봉안하였다.

(영정의 감실은 본묘내 동벽 아래에 별달리 마련하였음.) 참봉은 전조(이조를 말함)로부터 별달리 지벌(地閥)과 문식이 있는 자를 택하여 차정하고 임기(50삭)가 차면 6품에 승진하였다.


전우(殿宇)의 수즙비(修葺費)는 규례에 의하여 마련하였고 호세 80결을 면제하기로 획정했으며 각 능소에 비석을 세웠고 병오년에 장예원으로부터 분부를 받들고 예관 김영래(金永來)를 보내어 전.릉의 경계를 사방 백보로 정하였다.


아! 경술년(융희4년 1910년) 이후에 제향의 경비를 춘추에 걸쳐 90원씩 관부로부터 의례 지출하였고, 병인년(1926년)에 비로소 축현릉 참봉을 두어 춘분과 추분에 석채례(釋菜禮)로 거행하고 제향의 경비 1백20원씩 의례 지출했으며 각 능마다 수호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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