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뿌리찿기

경주김문원류

오늘의 쉼터 2008. 5. 16. 11:27

경주김문원류

 

1.김씨의 근원(根源)

한국 제1위의 성씨 인구를 가진 김씨의 본관은 문헌상 623본이나 나타나 있으나, 이 중 시조가 뚜렷한 것은 100본 미만이다.

이들 여러 김씨는 거의 모두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계와 신라의 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계의 어느 한쪽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갈래로 대별된다. 경주김씨계의 원조인 김알지는 65년(신라 탈해이사금 9) 경주 계림(鷄林)의 소나무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왕이 김(金)이라 지어 주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전하고 있는데, 신라 초기의 김씨왕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알지의 제7대손이 된다.

알지계는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600여 관향(貫鄕)으로 분종(分宗)되고 《김씨대종사(金氏大宗史)》에도 266본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중 뚜렷이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50여 본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헌강왕계(憲康王系)의 광산, 무열왕계(武烈王系)의 강릉, 신무왕계(神武王系)의 영동김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경순왕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에게는 아들 9명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넷째 은열(殷說)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던 듯하며, 경주김씨 계림군파, 태사공파, 판도판서공파 등 거의 모든 계파가 은열의 후손이며 같은 김씨중에도 구안동(舊安東). 청풍(淸風). 금녕(金寧). 도강(道康). 전주. 양근(楊根:益和). 영광. 안산 등이 모두 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밖의 경주김씨계로는 선산(善山). 의성. 언양(彦陽). 울산. 나주. 상산(商山). 수원. 안로(安老). 연안. 순천(順天). 고령.양근 등을 들고 있다.

 

2.경주김씨의 본원(本源)

경주는 경북 남동부에 있는 시. 면적 1,319.6 km2. 인구 27만 8019(1994). 북동쪽으로 포항시, 서쪽으로 영천시?청도군, 남쪽으로 경남 울산시 울주구, 동쪽으로 동해에 면한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개국하였다. 이 뒤로부터는 방언(方言)으로 왕경(王京)을 서야벌이라고 통칭하였다.

혹은 사라(斯羅)라고 하고, 혹은 사로(斯盧)라 하다가 뒤에 신라라 일컬었다. 탈해왕(脫解王) 때에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를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하였는데, 기림왕(基臨王)이 다시 신라로 하였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나라를 양국하니 태조 왕건은 경주라 하였다. 뒤에 승격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가 되었으며, 성종(成宗)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쳤다가 또 유수사(留守使)라 일컬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때에 강등(降等)시켜 경주 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고, 또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다가 다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하였다.

그때 예방(銳方)이 올린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삼경(高麗三京)이라는 글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경유수를 둔 것이다.

신종(神宗) 때에 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주(州) 군(郡)을 겁략(劫掠)하므로 사자를 보내어 평정하였다.

뒤에 동경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성한다는 말을 만들어 상(尙)청(淸)충(忠)원주도(原州道)에 격문(檄文)을 전하고, 반란을 음모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고, 관내의 주(州)부(付)군(郡)현(縣)을 빼앗아 안동(安東)상주(尙州)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고종(高宗) 때에 다시 유소로 고치고, 충렬왕 때에 계림부(鷄林付)로 고쳤다.

본조에서는 태종조(太宗朝)에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쓰고,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37년 7월 양북면(陽北面)에서 감포리(甘浦里) 외 8개리가 감포읍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49년 5월에는 강서면(江西面)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55년 9월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고, 군의 명칭이 월성(月城)으로 바뀌었다.

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이러한 경주의 지명 변화로 우리의 본관의 호칭도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으니 고려시대에는 경주인, 신라인, 신라종성 또는 옛서울을 나타내는 경조씨 그리고 다시 계림으로 불려지기도 했으며 일부에서는 옛이름을 지칭하여 월성가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3.본관 경주의 역사(歷史)

김해김씨계와 더불어 김씨의 2대 주류를 이루는 대보공(大甫公) 알지계(閼智系) 가운데서도 그 대종을 이루는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파계가 복잡하지만, 대충 4-5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파로는 은열공파(殷說公派).태사공파(太師公派).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

영분공파(永芬公派).호장공파(戶長公派)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역대에 인물을 많이 배출하기는 은열공파와 태사공파로, 경주김씨가 조선시대에 배출한 6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가 모두 이 두 파에서 나왔다.

〈은열공파〉 파조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은 경순왕의 넷째 왕자로 전하며, 중시조는 고려의 장군 순웅(順雄)이다.

조선 전기의 좌찬성 균(梱)은 중시조의 12대가 되는데, 그의 후손에서만 정승 3명과 많은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좌의정 명원(命元), 판서 남중(南重), 숙종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부친 주신(柱臣), 좌의정 사목(思穆), 판서.대제학 창희(昌熙), 고종 때의 유명한 총리대신 홍집(弘集) 등이 모두 순응의 후손이다. 〈태사공파〉 태사공 인관(仁琯)은 경순왕의 후손, 혹은 헌강왕의 7대손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8대손 자수(自粹)는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자결로써 충절을 지켰고, 그의 8세손이며 조선시대의 황해도 관찰사인 홍욱(弘郁)의 자손에서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은열공파 명원의 자손과 더불어 경주김씨의 2대명문으로 꼽힌다.

영의정 흥경(興慶), 예조판서 이주(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노경(魯敬), 서예가 정희(正喜), 판서 노응(魯應), 좌의정 도희(道喜), 영조의 국구(國舅)이며 어영대장을 지낸 한고(漢考), 우의정 관주(觀柱)가 모두 홍욱의 후손이며, 또한 노론(老論)의 거두 유경(有慶)은 그의 종증손이 된다.

<판도판서공파〉 경순왕의 후손 장유(將有)를 파조로 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지는 판서 제학 정(淨)이다.

<호장공파〉 대표적 인물은 고려 인종 때의 명신이며 사학자로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부식(富軾)이다. 그러나 그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영분공파> 파조 영분공 명종(鳴鍾)은 경순왕의 셋째왕자로 전하며 후대에서 수은공파, 한림시어사공파, 두계공파 등 10여개 소파로 분파되었다.

 

4.신라김씨의 탄강사적(誕降史蹟)

신라 탈해왕(脫解王)九년 을축(한명제(漢明帝)영평(永平)八년 서기(西紀) 六五년) 三월 밤에 월성

(月城)서쪽 시림(始林)의 수풀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어 날이 밝으려 할 무렵에 포공(匏公)

왜국(倭國)사람이 박(匏)을 타고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포공(匏公)이라 칭호(稱號) 하였다
을 보내어 살펴본 즉 금빛이 찬란한 조금 만한 궤가 나무 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물 아래에서 울거늘 포공(匏公)이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아뢰었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와 열어본즉 조그만 사내 아이가 그 가운데 있는데 상모(相貌)가 기이(奇異)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좌우(左右)신하에게 이르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을 도와 아들을 내려주신 것이

아니 겠는가 하고 이에 거두어 길렀다.

점점 장성함에 미쳐 총명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난지라,

이에 알지(閼智)라 고 이름하였고 금빛 나는 궤에서 나왔으므로 김씨(金氏)로 성(姓)을 삼았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그로 인하여 국호(國號)로 삼았다.

그리하여 태자(太子)강조(强調)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니 이는 곧 마정부인(摩貞夫人)석씨(昔氏)이다.

칠세(七世손孫)에 이르러 미추(味鄒)가 점해(沾解)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상고 하건데 옛날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이 동해(東海)의 변두리에서 거주하여 여섯 마을을

이룩하고 각기 촌장(村長)이 있었다.

한선제(漢宣帝)오봉(五鳳)원년(元年)(신라(新羅)박혁거세(朴赫居世)원년(元年)서기(西紀 前 五七年) 임자(壬子)에 고호촌장(高墟村長)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에 올라 나정(蘿井: 부남칠리(府南七里)에 있음)의 수풀 사이를 바라보니 용마(龍馬)의 상서가 있으므로 가서 살펴보니 태보(胎褓 태싸는 보자기)가 있어 알과 같고 박(匏)과 같거늘 쪼개어 박씨(朴氏)의 시조(始祖)혁거세(赫居世 우리나라 사람이 포(匏)를 박이라 함으로 성(姓)을 박씨(朴氏)라 하였다.)를 얻었다.

나이 칠세(七歲)에 숙성(夙成)하고 지혜가 뛰어나고 십삼세(十三歲)에 미쳐 육부장(六部長)이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았다.

파사국왕(婆娑國王) 혹은 다파국(多婆國)이라 하고 또 룡성국(龍城國)이라고도 하니 왜국(倭國)동북방(東北方)수천리(數千里)밖에 있음)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이하여 태기(胎氣)가 있더니

칠년(七年)만에 큰 알을 낳았다.

임금이 말하시기를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비단에 싸서 독(?)속에 넣고 배에 실려 축사(祝辭)하기를 아무데든지 연분있는 곳으로가라 고 하였다.

처음 금관국(金官國을 가락국駕洛國)에 이르렀는데 괴상히 여겨 받아 들이지 않았고 진한(辰韓)의 아진포(兒津浦 : 경주(慶州)의 동쪽 八十里)에 도착하니 노구(老?)가 건져내어 독(?)을 열고 석씨(昔氏)의 시조(始祖)탈해(脫解)독(?)이 처음 당도했을 때에 까치(鵲)의 상서가 있으므오 조(鳥)를 생각하고 석(昔)으로 성씨(姓氏)를 삼았음을 얻어 수양(收養)하였다.

장성함매 풍채(風采)가 청수(淸秀)하고 지식이 뛰어나니 남해(南海)가 딸로서 댁을 삼아 주었다.

유리왕(儒理王)이 훙(薨)하매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았다.

아 ! 우리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또 계림(鷄林)에서 탄생(誕生)하여 드디어 박씨(朴氏)석씨(昔氏)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삼성시조(三姓始祖)의 탄생은 대개 천명(天命)인즉 하늘 땅사이의 맑은 정기(精氣)가 배태(胚胎 아기 배는 것)되어 거연(居然)히 형상을 이룬 것은 태초(太初)에 사람이 생겨난 도(道)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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