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1824∼?)이 입던 금관조복 중 금관 1점이다.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 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이 금관은 1948년 석주선씨가 심동신의 7대 손자며느리로부터 인수받았다고 하며, 1890년대를 전후한 구한말의 유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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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리 사지 옆 평야마을에 동향으로 세운 초가이다. 안채와 헛간채, 그리고 최근에 지은 헛간채가 있다. 안채는 건축양식으로 보아 18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헛간채는 1938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안채는 안마당을 앞에 두고 '一'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큰방과 작은방·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왼쪽 뒤로 헛간채가 있는데, 방과 광·잿간·헛간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형태이다. 부엌에는 조왕신을 모시는 가정신앙이 살아 있다. 마당과 뒤안 등에는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대체로 지을 당시의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안채가 초가로는 격이 높은 민가이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설명
평야 마을에 위치한 이 집은 초가인 안채와 헛간채 두채와 안마당 왼쪽에는 헛간채가 한채 있다.
안채는 안마당을 앞에 두고 정동향(正東向)하여 있고 헛간에는 왼쪽 뒤로 비껴서 같은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안채는 세부기법으로 미루어 18세기 말 건축으로 보이며 헛간채는 1938년에 축조되었다.(상량문(上樑文)은 세재무인(“ 歲在戊寅)…유좌묘향(酉坐卯向)…” 이란 기록이 있다.).
안채는 4칸(間) 전후퇴집이지만 원래는 부엌칸 없는 3칸 전후퇴집으로서 아마도 어떤 집의 사랑채로 쓰였을 것이다. 간살이는 앞퇴에 우물마루를 깔고 왼쪽에 작은방을 두며 다음은 복판에 칸반(間半) 크기의 큰방이 배치되었다. 나머지 반칸(半間)은 부뚜막이 시설되며 상부는 큰방에서 이용하는 벽장이 마련되었다. 뒷퇴 복판은 우물마루가 놓이고 오른쪽은 큰방에서 이용하는 골방이다. 집의 오른쪽에는 다시 칸반을 달아내서 부엌으로 쓴다.
구조는 2고주5량이며 납도리인데 단면이 모를 굴린 네모꼴이다. 보의 단면 역시 네모꼴인데 퇴보는 기둥몸에 산지로 맞춤하였다. 대공은 동자주로 처리되었다. 측면 지붕틀은 우미량(충량)을 대들보에 걸치고 우미량 굽은 등에 중도리를 받은 외기를 올려 놓으며 종도리 끝머리를 외기 위에 올리는 방식을 채택했다. 댓돌은 막돌 허튼층 쌓기 세벌대 높이이고 주초(柱礎)는 덤벙주초이며 네모기둥이다. 지붕은 우진각 초가집인데 추녀 끝에는 사래를 올려서 추녀 끝을 치켜올렸다. 문틀은 벽선(문설주)은 문짝처럼 연귀로 맞추고 쌍사를 넣어 장식했다. 쌍사는 상방에도 새겨넣었는데 이것은 샛벽이 덮히도록 하였다. 문지방 아래는 머름을 두껍게 넣었는 바 이는 민가에 있어 고식기법(古式技法)이다.
헛간채는 3칸전퇴집이며 왼쪽에 아랫방, 가운데에 광, 오른쪽은 다시 중간을 반으로 막아서 앞은 헛간, 뒤는 잿간인데 세부기법은 민가의 일반적 형태이다. 부엌에는 조왕신을 모시는 가정신앙이 살아 있으며 뒤안과 마당 등에는 군수리(軍守里) 사지 출토로 여겨지는 석불이 많이 놓여 있다.
가옥 전경 안채 안채 앞 툇마루 광채 헛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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