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동산을 배경으로 양지바르고 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칠성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안채는 조선 후기(1800년대 초반)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 등은 나중에 지은 것들이다.
대문채, 중문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광채,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집이다. 기다란 바깥행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이고 그 왼편에 광채가 있다. 광채 위쪽으로 중문간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헛간채, 오른쪽에 다시 중문이 있어 이곳을 들어서면 안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남도식 배치방법을 띠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 부엌(찬방 포함)을 두었으며 오른쪽에 건넌방을 놓았다. 안방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를 만들었는데 건넌방 앞까지 설치해 통로로 이용한 점이 특이하며, 한쪽 옆면 전체를 부엌으로 크게 만든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사랑채는 ㄱ자 모양으로 안채 쪽에서부터 부엌, 아랫사랑방, 꺾어져 큰사랑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사랑 옆으로는 누마루를 마련하였고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달았다. 나머지 건물들은 20세기초에 지은 것들로 바깥행랑채는 11칸 크기에 광, 방, 헛간 등이 배치되어 있다. 광채는 6칸으로 양 끝에 온돌을 설치하였다.
집을 지은 기법이 옛 법식을 잘 따르고 있으며 크고 작은 공간구성의 배열 또한 짜임새 있게 갖추고 있는 양반집으로, 우리나라 전통 상류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전문설명
들을 앞에 두고 길에 면한 길다란 행랑채의 가운데 우뚝 선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에 이른다. 바깥마당 서쪽에는 또 하나의 광채가 길게 배치되고 동쪽은 공간감을 형성키 위해 앞의 행랑채가 뒤로 머리를 꼬부렸다. 한대(臺) 높게 마련된 사랑공간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왼쪽에 바깥마당으로 향한 문간채 중문을 ㄹ자로 꺾어 들어서면 가운데 마당이 나타난다. 가운데 마당 서쪽에는 중문간채가 꼬리를 돌려서 ㄴ자로 앉았다. 다시 안채 맞은편에 배치된 광채의 서쪽간 내문(內門)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다다른다. 안채는 안마당을 둘러싸서 ㅁ형으로 배치되고 사랑채는 안 광채 앞에 중문간채와 나란히 배치되는데 ㅗ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꽁지를 안채 동쪽 날개와 맞춰 오른쪽을 막고 서쪽은 뒤광채와의 사이에 담장을 둘러 샛마당을 구성했다. 사랑마당은 사랑채 앞에 마련되었는데 바깥마당 보다 한 대 정도 높으며 후원(後園)은 사랑채 동쪽에 조성되었다. 샛마당과 안마당, 사랑후원과 안마당, 가운데(중)마당과 사랑마당 사이에는 각각 샛문이 기묘하게 만들어져서 각 공간의 폐쇄감을 높였다. 특히 사랑마당과 바깥마당을 일각대문으로 연결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별당형식의 공간구성을 보인 점이 흥미롭다. 이와 같이 이 집은 크고 작은 공간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대문들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공간율동을 구성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남향(자좌오간(子坐午間))집이다.
안채는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도방식의 공간구성을 하였다. 곧 몸채 서쪽 귀에 세로로 긴 3간 부엌을 두고 도리간으로 2간 안방, 2간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치했다. 안방과 건넌방 앞까지의 사이는 툇마루를 시설했는데 건넌방 앞에도 두어서 통로로 이용하는게 특이하다. 대청 앞에는 문없이 바로 마당으로 개방했으며 안방과 대청 사이는 분합문으로 구분했다. 부엌 상부에는 뒤의 2간만 다락을 만들고 서쪽으로 헛기둥을 내밀어서 살강을 설치했다. 살강 위에는 밖으로 비를 막기 위해 따로 눈썹지붕을 해서 이은게 재미있다. 안방과 건넌방 뒤쪽 역시 헛기둥을 세워 반침을 만들었으며 웃방과 대청 사이에는 쪽마루를 깔았다. 서쪽 날개에는 부엌 앞에 구들을 시설했으며 동쪽 날개에는 간반(間半) 크기의 작은사랑, 작은부엌(상부 다락), 광으로 구성되었다. 건넌방과 작은사랑 동쪽에도 조그만 쪽마루가 깔렸다.
구조(構造)는 몸채가 1고주5량(대청 중앙은 긴보 5량), 날개는 3량으로 처리했고 지붕은 골기와 합각(合閣)인데 날개 앞까지 합각을 만든 것이 특색이다. 댓돌은 외벌대 자연석(自然石)이고 네모꼴 높은주초이며 네모기둥이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종도리와 처마도리에만 장혀를 받치고 중도리에는 없다. 외진주 상부에는 단이(보아지)로 대들보를 보강(補强)했으며 대공은 동자주를 했는데 대청(大廳) 중앙만 사다리꼴이다.
사랑채는 1900년(年) 전후(前後)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특이한 평면구성을 보인다. 서쪽에 건넌사랑을 두고 대청, 좌우 2간(間)의 큰사랑, 맨 동쪽에 약간 높혀 누마루를 시설했다.
큰사랑과 건넌사랑까지의 앞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대청(大廳)은 전면으로 개방(開放)되었다. 건넌사랑과 윗사랑방은 각각 대청으로 불발기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틀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큰사랑은 윗사랑, 샛사랑으로 구분되는데 샛사랑 뒤로 꺾어져서 아랫사랑방을 두었다. 꼬리 맨 뒷부분이 사랑부엌이다. 큰사랑의 각방은 미닫이문으로 구분될 뿐 개방(開放)이 가능하다. 건넌사랑 뒤에는 헛기둥을 세워 반침을 만들고 대청, 윗사랑, 아랫사랑 뒤쪽으로는 쪽마루가 놓였다.
구조는 몸채가 1고주5량이고 꼬리는 3량으로 처리했으며 지붕은 골기와 ·합각지붕 ·겹처마인데 꼬리부분은 박공지붕으로 처리되었다. 댓돌은 화강암 장대석 외벌대이고 네모꼴 높은주초, 네모기둥이며 장혀받친 납도리집이다. 안채와 다른 점은 대들보를 받치는 단이(보아지)가 없는 점이다.
나머지 건물은 20세기(世紀) 초(初)에 지어졌으며 모두 맞걸이 3량구조의 박공지붕집이다. 안의 광채는 대문간과 3개의 광으로 구성된 바 모두 빈지널로 벽을 했다. 중문간채는 모두 9간(間)인데 전면에는 대문간과 헛간을, 꼬리쪽은 구들이 배치(配置)되며 행랑채는 11간(間)으로 가운데 솟을대문과 양옆의 광들과 구들+대청으로 이루어졌다. 바깥 광채는 6간(間)인데 양 끝에 구들이 배치(配置)되고 나머지는 광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의 합각(合閣)에는 전돌로 완자무늬를 아로새겼으며 샛마당 광채 벽에는 사랑에서 바라볼 수 있게 수복(壽福)무늬와 팔각형 겹곡두무늬가 상긋법으로 그려져 있고 기타 담장의 문양도 화문담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둑담도 인상적(印象的)이다.
안채 안채 대청 대청에서 바라본 곳간채 대청 후면 중문에서 바라본 대문채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