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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아랍인이 본 신라

오늘의 쉼터 2008. 4. 17. 21:06
“돛배 띄워라, 동방의 이상향 신라로 가자”
 
▲ 중세 아랍 상인들이 남해로에서 이용하던 돛배 (<이슬람세계>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1996, 131쪽)
 
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들일까?
 그 동안 그 해답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서양사람들이 우리더러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의 나라’라고 하니, 남들은 물론, 우리 마저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 정답은 중세 아랍사람들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254년 경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 황제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가 돌아가 쓴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더 세스페데스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행이며,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안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배라고 알려져 있다.
 
9세기 지리서 “중국동쪽 위치”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라를 세계에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하여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세 아랍인들에게 신라는 한마디로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에는 ‘행운의 섬’이나 ‘불멸의 섬’으로 알려진 이상향이 두 곳에 있는데, 그 하나는 서방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대서양 상의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동방의 신라다. 그러나 같은 이상향이라도 아틀란티스는 무인도인데 반해, 신라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로서 경작지와 과수원이 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아틀란티스는 전설 속의 한낱 이상향에 불과하지면, 신라는 속세의 살아숨쉬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는 신라가 동경과 선망의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동경과 선망은 신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지견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 쇠사슬도 금붙이인 나라”
 
아랍인들은 지구상에서 신라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찌감치 제대로 알아냈다.
 섬과 산이 많은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바다(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고 9세기 중엽에 나온 한 지리서가 지적한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 오던 종래의 그리스-로마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가한 엄청난 발견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지리와 관련한 아랍 학자들의 기술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다.
그는 전래의 지리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넣었다.
 그는 아랍의 전통적 ‘7기후대설’에 따라 지구를 7개 지역으로 나누고, 매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등분하여 각기 지도 한 장씩을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세분도를 완성하였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를 명기하고 있다. 이 지도는 이때까지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원래 이드리시의 세계지도는 이라크 과학원이 1951년에 너비 2m, 폭 1m의 대형지도로 복원하였다.
필자는 1979년 바그다드박물관 전시실에서 벽에 걸려있는 이 지도를 목격한 바 있다.
 그래서 지난해 취재차 이 박물관을 찾아가는 모 방송사 취재진에게 확인을 부탁했더니, 지도는커녕 박물관 전체가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반문명인들에 의해 저지러진 저주 받을 현대판 반달리즘(문명 파괴)에 그저 비분강개할 뿐이다.
 
중세 아랍인들은 이렇게 신라의 위치나 지형뿐만 아니라,
 신라의 자연환경에 관해서도 놀라운 기록들을 남겨놓고 있다.
열사에 찌들고 풍랑에 지친 그들에게 湲茨値좡?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소기의 안주처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라는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하고야 만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는, 말 그대로의 ‘황금의 나라’다.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쇠사슬도 금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이 믿고있는 신라의 황금상이다.
 
비단·담비가죽·계피등 풍부
 
▲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지도(1154년) (필자 제공)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심정에서 신라인들의 유족한 생활상과 쾌적한 환경을 세심한 필치로 이모저모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까즈위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향유고래에서 나는 사향 못지 않은 향료)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 알라만이 시혜자이다.”
그 환경이 얼마나 정갈했으면 물 뿌린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외지에서 온 환자는 금새 치유되겠는가 하는 극찬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이슬람적 세계관에 훈육된 사람답게 그는 신라의 이와 같은 윤택한 생활환경을 유일신 알라의 시혜로 돌린다.
 
그런가 하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인종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또한 무모한 일이지만, 그들이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무구무병한 환경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말로 그 외모가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친절성이나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윤리도덕성에 대해 아랍인들이 품고있는 일종의 선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 바닷길 통해 물산 교류
 
▲ 이드리시가 제작한 세계지도의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명기된 신라지도(5개 섬) (필자 제공)
그밖에 신라인들의 종족적 기원이나 신라의 대외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관한 기술에서도 눈길을 끄는 여러 대목이 있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인들이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신라와 중국(당나라)간의 관계는 모화사상이나 사대주의에 바탕한 조공관계가 기본이었다는 통념에 반해, 양국간에는 상호성에 입각한 선물교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술은 양국관계의 다른 한 측면을 음미해 보게 한다.
서로가 선물을 교환하지 않으면 천벌로 가믐이 들게 한다는 것은 천리를 빌어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방의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신라에서 나는 물산이 아랍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세기 후반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신라에서 비단(하리르), 검(피린드), 사향(미스크), 말안장(수루즈), 흑담비(삿무르)가죽, 오지그릇(가돠르), 계피(다루쉰) 등 물품(그밖에 몇 가지는 확인 안됨)을 수입해 갔다.
 
 
그 통로는 주로 중세 아랍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아랍 특유의 돛배가 이용되었다.
비단이나 검, 오지그릇이 국제무역품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신라의 대외교류사에서 자못 의미있는 일이다.
 
‘은둔의 나라’는 왜곡된 시각
 
이렇듯 중세 아랍인들의 캔버스에는 윤색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신라의 넉넉하고 진취적인 자화상이 생생히 그려져있다.
이런 것을 알 바 없는 서구인들은 19세기 말 우리를 ‘은둔’의 화신으로 곡필했고, 거의나 같은 시기에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까지 던져졌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쳐지면 참 역사가 난도질 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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