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있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전문설명
토성의 길이는 675m(동벽 185, 서벽 165, 남벽 155, 북벽 170), 높이 3.5m, 폭 8-13m, 문지 4개소, 곡성 12개(네모서리, 동서남북 각2개) 남문터와 북문터는 좌우의 성벽이 어긋나게 만든 것이 특징이며, 동·서문과 함께 4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곡성< 曲城 > 모양을 이루고, 이 네 모서리와 문터 사이마다 곡성의 모양이 있어서 모두 12개의 치성< 雉城 >을 두고 있다. 이 토성은 문헌상의 기록이 없었으나, 근래에 발견된 조선 영조 20년(1744)에 승려 영후< 靈休 >가 기록한『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이 토성 관련 기록이 있다. 신라말 호족의 시기에 궁예< 弓裔 >가 양길< 梁吉 >의 부하로 있다가 군사를 나누어 동쪽을 공략할 때에 지금의 상당산성을 쌓고 도읍을 삼아 살았다. 후에후백제의 견훤이 상당산성을 빼앗고, 상당산성의 서문 바깥 까치내< 鵲江 >의 곁에 토성(정북동 토성으로 추정)을 쌓고 창고를 지어 부세< 賦稅 >를 거두어 쌓아 두었다가 상당산성 안으로 운반해 들였다. 이러한 이유로 후세 사람들이 시로 읊기를 들판의 토성은 백제< 百濟 >때를 지나오고, 암자의 금부처는 산한< 三韓 >때를 거쳤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정북동 토성이 혹시 후감국의 쟁란기인 서기 9세기말에서 10세기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였으나, 성내 민가 신축시에 돌화살촉과 돌창, 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고, 성의 위치와 주변여건이 비교적 성곽으로서의 초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처음 축조연대는 더욱 소급될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해 주었다. 1984년 충북대 차용걸 교수가 학계에 보고한 이래, '96∼'97년간 서쪽 성벽일부와 서문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해본 결과, 성벽의 구축방법에 있어서 벽체부분은 안팎으로 나무기둥을 세워서 내부를 다지는 공법이 채택되고, 기단을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벽체의 안팎에 다시 기둥을 세워 축조한 방식을 취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서문터는 굴립주에 의한 문이 있었다가 후대에 냇돌 적심을 이용한 초석 기둥으로 대체되었음이 밝혀졌다. '99년 성내 동반부와 남반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주거유구(3.2x4.5m), 기둥구덩유구, 길 유구, 냇돌 무더기 유구등이 확인되었고, 성외 동남부 및 남문 바깥에서 해자가 확인 되었다. 정북동 토성은 현존 유구의 상태가 가장 완전한 형태를 보여주고 잇을 뿐만 아니라,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결과 확인된 토성의 구조나 출토유물 등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발전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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