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예안리 시례마을 주변에 있는 가야 무덤들이다.
여러차례 발굴조사 결과 가야 때의 각종 무덤 형태가 중복되어 나타났으며 무덤에서 사람 뼈가 많이 발견되었다. 총 212기가 조사되었으며 그 중 널무덤(토광묘) 64기,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수혈식장방형석실묘) 108기, 독무덤(옹관묘) 24기,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횡구식방형석실묘) 16기가 발견되었다.
널무덤은 예안리 무덤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널(관)의 사용은 불분명하다.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은 4벽을 만든 상태나 바닥시설로 보아, 만든 시기의 선후관계를 나눌 수 있다. 독무덤은 길쭉한 2∼3개의 항아리를 연결하여 만든 것으로 전체 길이가 1m 미만이다.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에 인접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상호간 친근관계에 있는 어린아이용 무덤으로 보고 있다.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은 거의 파손된 상태라 전체적인 구조파악은 어려운 상태이다.
출토 유물 중 토기는 회백색와질, 적갈색연질, 회청색경질 토기류가 있다. 철정, 가위, 재갈, 도자들을 비롯한 철기류가 나오며, 150호 널무덤에서는 투구가 발견되었다. 각 무덤들마다 사람 뼈들이 나오고 있어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장식품으로 금·은제 귀고리와 유리·호박제 구슬류들이 출토되었다.
무덤 형태나 출토 유물로 보아 가야 전기에서 후기까지의 오랜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유적이다.
전문설명
구포(龜浦)에서 김해시(金海市)로 가는 국도(國道)에서 6Km 쯤 북(北)쪽으로 들어가 낙동강(洛東江) 북안(北岸)의 평지(平地)가 뒤 산지(山地)와 접(接)하는 곳에 위치(位置)하며 1976년에서 79년까지 네 번의 년차발굴(年次發掘)을 통해 목곽분(木槨墳)(목개토광(木蓋土壙)의 가능성(可能性)있음)59기(基), 석곽분(石槨墳) 93기(基), 방형석실분(方形石室墳) 13기(基), 옹관(甕棺) 17기(基), 기타(其他) 1 등 183기(基)의 고분(古墳)이 확인(確認)되어 이 일대(一代) 1,313평(坪)이 사적(史蹟)으로 지정(指定)되었다.
이 고분(古墳)들은 지상(地上)에 봉토(封土)는 없었으나 지하매장부(地下埋葬部)가 층(層)을 이루어 나타나 3세기(世紀)부터 7세기(世紀)까지의 가야시대묘제(伽倻時代墓制)의 실상(實相)과 변천상(變遷相)을 알 수 있었고 특히 제일차년도조사(第一次年度調査)에서만 88기의 고분(古墳)에서 125개체(個體)의 人骨이 수습(收拾)되어 가야시대(伽倻時代)의 중요고분군(重要古墳群)으로 각광(脚光)을 받게 되었다.
여기 고분(古墳)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토광묘(土壙墓) 또는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라고 부를 수 있는 목곽분(木槨墳)이며 예를 들어 4세기 전반(前半)에 편년(編年)되는 74호분(號墳)의 경우 사지(砂地)에 파여진 묘광(墓壙)의 평면(平面)은 모서리가 둥근 장방형(長方形)((東西長軸))으로 크기는 4.7×2.5m이고, 다리달린 직구호(直口壺), 노형토기(爐形土器)등 瓦質土器와 最高式陶質土器인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 철모(鐵 ), 철부(鐵斧), 골족(骨鏃)드이 부장(副葬)되어 있었다. 이 고분에서는 목질(木質)은 발견(發見)되지 않았으나 76호분(號墳)에서는 광상면(壙上面)에 탄화목질(炭化木質)이 흐트져 있어 목개(木蓋) 혹은 목곽(木槨)이었다고 추측(推測)된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토광묘(土壙墓)가 목개토광묘(木蓋土壙墓)·목곽묘(木槨墓), 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다음, 4세기 중엽경(中葉頃)에 새로 등장(登場)라는 것은 판석(板石)을 짜서 만든 석관계(石棺系) 장방형소형석관분(長方形小形石槨墳)들이며 31호분(號墳)의 경우 동서장축(東西長軸)의 석곽(石槨)은 크기 1.25×0.5×0.4m(길이)로 4벽(壁)은 수매(數枚)의 두터운 판석(板石)으로 짜고 천장(天井)은 판석(板石) 3매(枚), 피장인(被葬人)은 2세(歲)가량의 동침유아(東枕幼兒)이고 발쪽에 고배(高杯)등 토기(土器) 5점(點)이 있었다. 이 석판계량식(石板系樣式)의 다음에 오는 것이 역시 동서방향(東西方向)의 석곽(石槨)이면서 크기가 커지고 돌이 괴석(塊石)으로 바뀐 수용식장방형석곽묘(竪 式長方形石槨墓)이며 44호분(號墳)의 경우 크기는 3.2×0.6×0.8m로서 늘어난 부장품(副葬品)중에는 철대도(鐵大刀)도 들어있다.
이들 석곽분(石槨墳)의 연대는 5∼6세기로 편년(編年)된다. 이 시기(時期)에 유소아(幼小兒)를 위해서 합구옹관(合口甕棺)이 성용(盛用)되고 있다. 예안리묘제(禮安里墓制)의 마지막에 오는 것이 방형석실분(方形石室墳)이며 그 연대는 6세기 후반(後半)에서 7세기에 걸친 것으로 모두 기부(基部)만이 남아 있어 자세한 구조(構造)는 알 수 없으나 49호분(號墳)의 경우 동서(東西) 약 2.1m, 남북(南北 약 1.9m이고 떨어져 있는 개석일매(蓋石一枚)로 보아 천정(天井)은 궁융형(穹 形)으로 좁혀졌던 모양이다.
내부(內部)에는 동(東)·서벽(西壁)에 붙여 2개의 시상(屍床)이 할석(割石)으로 만들어져 있고 입구(入口)는 남벽(南壁)의 중앙(中央)에 있었던 것 같다.
이 고분(古墳)에서는 남(男)5, 여(女)2의 7인(人)의 성인골(成人骨)이 엉켜져서 발굴(發掘)되어 추장(追葬)이 실시(實施)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과대( 帶), 세환이식(細 耳飾)등 장신구(裝身具)의 존재(存在)로 보아 여기 고분군(古墳群)의 주민(住民)들이 석관묘시기이래(石棺墓時期以來)로 지방(地方) 유력집단(有力集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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