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총은 선사시대에 인류가 조개를 먹고 버린 껍데기와 생활쓰레기가 쌓여 이루어진 것으로 조개더미 유적이라고도 하는데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창원평야의 중심부에 있는 낮은 구릉에 있고, 구릉의 꼭대기는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비탈진 곳에 조개더미들이 쌓여있는데 A지구, B지구, C지구라 부른다. 쌓임층은 가장 위에 겉흙층이 있고, 그 아래에 조가비층이 있으며, 바닥에는 부식토층이 깔려 있다.
발굴한 결과 A지구의 겉흙층에서는 신라 토기와 근대 도자기들이 나왔고, 조가비층의 윗부분에서는 중국 한나라 때 처음으로 만든 오수전이라는 화폐와 토기가 나왔으며, 아랫부분에서는 민무늬토기(무문토기)와 간석기(마제석기)가 나왔다. B지구에서는 적갈색 연질토기, 회청색 경질토기 등과 철기가 나왔고, C지구에서는 민무늬토기와 반달돌칼, 돌도끼, 와질토기 등이 나왔다.
구릉 꼭대기에는 흙으로 쌓은 성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성벽에서 수습된 토기는 이 성이 조개더미 유적과 관계가 적은 신라 때의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조개더미의 일부가 신라 때까지 계속 쌓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적에서 나온 오수전은 유적의 처음 쌓인 시기를 알려주는 자료로서 기원전·후 시기부터 유적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토기의 형식을 보면 A·D 4세기 무렵까지 이어지며, 성벽에서 나온 중국 당나라 화폐인 개원통보의 연대를 통해서 A·D 5세기 무렵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성산 조개더미는 그 위치나 규모로 보아 오랜 기간동안 창원지역의 중심지이었음을 보여주며, 창원 분지내에 있는 내동 조개더미, 가음정동 조개더미 등의 유적과 함께 당시의 생활유적으로 중요하다.
전문설명
유적은 창원외동 성산마을, 마산만(馬山灣)을 끼고 있는 창원평야의 중심부에 있는 해발 49m 높이의 낮은 구릉에 있다. 구릉 꼭대기는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구릉으로부터 서남쪽, 북쪽, 동쪽의 비탈진 곳에 조개더미들이 쌓여 있어 각각 A지구, B지구, C지구로 부른다. 유적이 있는 곳이 공업단지 조성지구가 되면서 유적이 없어질 뻔 하였으나 1974년에 발굴조사를 하여 유적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 사적으로 지정하였고, 지금은 창원공업단지 안에 유적 일부가 보호구역으로 남아 있고 유적전시관이 세워져 발굴에서 나온 중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유적의 층위관계를 보면 위로부터 10-30㎝ 두께의 겉흙층(표토층(表土層))이 있고, 그 아래로 2-3m의 조가비층(패각층(貝殼層))이 있으며, 바닥에는 부식토층이 깔려 있다. 조가비층은 다시 위쪽에 있는 흑갈색 찰흙층과 아래쪽에 있는 황갈색 찰흙층으로 나뉜다.
발굴 결과 A지구에서는 겉흙층에서 신라토기와 근대 도자기 조각들이 나오고, 조가비층에서는 위층에서 중국 한(漢)나라 때 만든 오수전(五銖錢)과 김해식 토기가 나왔으며, 아래층에서 무문토기와 간돌검(마제석검(磨製石劍))이 나왔다. 석기와 뼈·뿔 연모도 많이 나왔고, 청동팔찌도 한점이 나왔다. 조가비층 아래에 있는 바닥층에서는 쇠부리터(야철지(冶鐵址))로 볼 수 있는 구조물이 나왔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B지구에서는 적갈색 연질토기, 회청색 경질토기 등 김해식 토기와 철기가 나왔다. C지구에서는 무문토기, 반달돌칼(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돌도끼(석부(石斧)), 붉은간토기(홍도(紅陶)), 김해식 토기 등이 나왔다. 구릉 정상부에는 흙으로 쌓은 성이 일부 남아 있었는데 성벽에서 신라토기가 나와 조개더미 유적과는 관계가 적은 신라 때 성벽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조개더미의 일부가 신라 때까지 계속 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적에서 나온 오수전은 유적의 시작 연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기원전후 시기부터 유적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고, 신라토기의 형식을 보면 유적은 서기 4세기 무렵까지 이어지며, 성벽에서 나온 중국 당나라 화폐인 개원통보(開元通寶)의 연대를 통해 서기 5세기 무렵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마산 외동 성산패총 마산 외동 성산패총 발굴전경 야철지보존처리상태 출토유물 마산외동성산패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