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37호 서울 경모궁지

오늘의 쉼터 2008. 2. 20. 17:44


 

종     목 사적  제237호
명     칭서울 경모궁지 (서울 景慕宮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원
수량/면적 4,142㎡
지 정 일 1973.08.14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 28-2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종로구

일반설명

함춘원은 조선시대의 정원으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위치한 곳이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창경궁의 동쪽, 경희궁 개양문의 남쪽 등에 있는 궁궐의 정원 이름이 함춘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중 그 입지나 규모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창경궁 동쪽의 것이다.

함춘원은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을 짓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그곳에 관계없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성종 24년(1493)년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여져 창경궁에 딸린 정원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함춘원 밖의 백성들의 집을 없애고 확장하였으며, 군대를 배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고 대문을 만들었다. 그 후 중종은 백성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덕빈의 시신을 임시로 묻는 등 점차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사에 나눠주었다. 이후 140여년간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영조 40년(1764)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지었고, 정조가 즉위하자 이곳을 경모궁으로 불렀으며, 정조 9년(1785)에는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광무 3년(1899)에 경모궁에 있던 장조 즉 사도세자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으며, 경모궁도 경모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광무 4년(1900)에는 경모궁 터에 6성조 즉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초상을 모시던 영희전을 옮겨 세웠다.

그 뒤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후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옛 건물이 불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함춘원은 조선 후기의 세련된 건물 중 하나이며,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함춘문 뿐이다.


※(함춘원지 → 서울 경모궁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전문설명


함춘원< 含春苑 >은 조선시대의 원유< 苑유 >로 창경궁의 동쪽 구릉지대인 지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위치한 부근 일대 터이다. 지금 남아 있는 함춘원의 유적은 함춘문< 含春門 > 뿐이고 석단< 石壇 >은 후대에 설치된 경모궁< 景慕宮 >의 유적이다.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考 >』에는 창경궁 동쪽, 창경궁 요금문< 曜金門 > 서쪽, 경희궁< 慶熙宮 > 개양문< 開陽門 > 남쪽 등에 있는 궁궐의 후원의 이름을 함춘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지금까지 그 유지가 남아있고 그 입지나 규모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창경궁 동측의 것이다. 함춘원이 만들어진 것은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궁 동편의 지세< 地勢 >를 보강하기 위하여 이곳에 나무를 심고 원장< 垣墻 >을 둘러 잡인< 雜人 >의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성종< 成宗 > 24년(1493) 2월에 함춘원< 含春苑 >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져 창경궁 부속< 附屬 > 후원< 後苑 >이 되었다. 연산군때에는 함춘원 담장밖 높은 지역의 민가철거를 확장하고 기화이초< 奇花異草 >를 심어 더욱 심원하고 엄숙하게 하고, 담밖에 별정군< 別定軍 >을 배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고 원내에서 즐기기 위하여 대문을 만들었고 함춘원 북쪽에 신성을 쌓기도 하였다. 그 후 중종은 철거당한 사람들을 다시 돌아와 살게 하였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당시 덕빈< 德嬪 >의 시신< 屍身 >이 임시로 매장되기도 하는 등 점차 함춘원의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태복사< 太僕寺 >(사복사< 司僕寺 >)에 나눠 주면서 이후 140여년간 방마장< 放馬場 >으로 사용되었다. 영조< 英祖 > 40년(1764)에 북부 순화방< 順化坊 >에 있던 사도세자< 思悼世子 >의 사당인 수은묘< 垂恩廟 >를 이곳에 옮겨 지었다. 영조 52년(1776)에 정조가 즉위하자 비명에 간 생부 사도세자를 장헌< 莊獻 >의 시호< 諡號 >를 올리고, 묘우< 廟宇 >를 승격·개칭하면서 이곳은 경모궁< 景慕宮 >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 扁額 >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 日瞻 >·월근< 月覲 >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正祖 > 9년(1785) 8월에 경모궁과 장조의 원묘< 園墓 >에 대한 의식절차를 적은 궁원의< 宮園儀 >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헌종 5년(1839) 12월에 봉안각< 奉安閣 >이 소실되었으나 곧 중건되었다. 또 이곳에는 정조< 正祖 >·순조< 純祖 >·익종< 翼宗 >의 어진< 御眞 >이 봉안된 망묘루< 望廟樓 >가 있었다. 광무 3년(1899) 8월에 장헌세자< 莊獻世子 >를 장종< 莊宗 >으로 존호< 尊號 >를 올리면서 경모궁에 있던 장종의 신위< 神位 >를 종묘< 宗廟 >로 옮기게 되자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경모궁내에 있던 망묘루는 북부 순화방에 있는 장종< 莊宗 >의 생모 영빈< 英嬪 > 이씨의 묘사< 廟祠 >인 선희궁< 宣禧宮 > 경내로 옮기고 이름을 평락정< 平樂亭 >이라 하고, 망묘루에 있던 정조·순조·익종·헌종·철종의 어진< 御眞 >을 옮겨 봉안하였다. 또한 경모궁의 이름도 궁 대신 경모전으로 고쳤다. 광무 4년(1900)에는 경모궁터에 6성조< 聖朝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어진을 봉안< 奉安 >하던 곳인 영희전< 永禧殿 >을 옮겨 세웠다. 그 뒤 일제가 나라를 강점한 후 함춘원 구지 즉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고 이곳은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어버렸으며, 더욱이 6·25동란으로 옛 건물이 불타 원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함춘문< 含春門 >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전·후면의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가운데 기둥은 네모기둥으로 여기에 각각 문을 달고 창방위에는 안상을 끼우고 홍살을 달았다. 공포는 초익공< 初翼工 >으로 매우 간결하며 겹처마이다. 조선후기의 세련된 건물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석단< 石壇 >의 길이는 약 30m, 폭은 약 18m가 되는데 전면 4곳에 돌계단이 있다. 이 기단 주변에 근래에 세워진 건물이 있다. 1973년에 함춘문을 포함한 일대가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30m, 폭은 약 18m가 되는데 전면 4곳에 돌계단이 있다. 이 기단 주변에 근래에 세워진 건물이 있다. 1973년에 함춘문을 포함한 일대가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었다.




함춘원지함춘문

경모궁지 석축

경모궁지 원경1

경모궁지 원경2

경모궁지 전경

계단

계단면석

발국 석물

석단과 계단

함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