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고려 태조를 비롯한 7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전각을 세웠고 정종 원년(1399)에는 태조 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제사를 지냈다. 그후 세종 5년(1423), 문종 2년(1452)에 고쳐 지었다. 문종 때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의 충신 15명을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건물의 관리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 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완강하게 조선을 거부하였던, 고려시대의 왕씨 문중들이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옛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전문설명
숭의전(崇義殿)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고려 태조(太祖)를 비롯한 7왕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여 제사 지내던 사당(祠堂)이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자 고려왕조의 종묘사직을 없앨 생각으로 여왕(麗王)의 위패(位牌)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웠더니, 배는 물에 떠내려 가지 않고 안하(岸下)에서 부동(不動)하므로 왕씨 자손이 남몰래 위패(位牌)를 거두어 이 곳에 묘(廟)를 짓고 이를 봉(奉)하였다고 한다. 후일 이 사실을 안 이태조(李太祖)는 그의 6년(1397년)에 연천군 미산면에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묘전(廟殿)을 세웠고, 정종(定宗) 원년(1399)에는 태조(太祖)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7왕을 제사 지냈으며, 세종 5년(1423년), 문종 2년(1452)에 중건했다. 이후에 역대군왕(歷代君王)이 수리하고 왕건 태조를 봉사(奉祀)하였고, 제 5대 문종조(文宗朝) 때는 전조(前朝)를 예우(禮遇)하여 숭의전(崇義殿)이라 이름지었고, 고려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4왕의 위패를 모시고 이와 함께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선생 외 열 다섯 분을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이 숭의전(崇義殿)의 관리도 고려왕족의 후손에 맡겼는데, 이것은 조선왕조가 고려유민을 무마하여 왕족의 불평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도(方途)였다. 아울러 선조(宣祖) 때는 여조왕씨(麗朝王氏) 후예로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여 전각(殿閣)의 수호와 향사를 보게 하였다. 일제시에도 조선총독부가 이를 계승하였던 곳인데, 6·25동란으로 전각(殿閣)이 소실되었다.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사적 (史蹟)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에는 왕씨후손이 정전(正殿)을 복구했고, 국비 및 지방보조로 1975년 2월에는 배신청(陪臣廳)(13평)을 1976년 1월에는 이안청(移安廳)(8.7평)을 1977년 2월에는 삼문(三門)을 신축하였다.
이 숭의전(崇義殿) 일대는 임진강안(臨津江岸), 단애절벽상(斷崖絶壁上) 경승지로서, 노수 (老樹)가 울창하여 전각(殿閣)을 싸고 각하(脚下) 일대는 만경창파(萬頃蒼波) 회변유수(回邊幽水)한 별천지(別天地)이며, 여조 (麗朝)의 왕씨(王氏)문중들이 완강하게 이씨조선(李氏朝鮮)을 거부하였고,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전조(前朝)를 흠모한 충절(忠節)이 깃들여진 곳이다.
숭의전전경 전경 숭의전근경 숭의전전사청 숭의전지 앙암재 홍살문 고려 태조 위패 내부 담장 배신청 내부 배신청 숭의전 숭의전과 배신청 어수정 외부 전경 원경 이안청 전경 전사청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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