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17호 화성 당성

오늘의 쉼터 2008. 2. 20. 07:24


종     목 사적  제217호
명     칭화성 당성 (華城 唐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34,545.46㎡
지 정 일 1971.04.15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시     대삼국시대
소 유 자국유,사유
관 리 자화성시

일반설명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내벽은 흙으로 쌓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하였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전문설명


남양반도의 서신·송산·마도면의 경계가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에 위치한 해발 165.7m인 구봉산(九峰山) 정상부와 동향한 계곡 및 서남쪽 능선을 에워싼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상에 오르면 서해의 여러 섬들이 그림과 같이 바라다 보인다.

산성의 전체 모양은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우며, 작은 계곡을 두른 포곡식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고 있는 본성(本城)이 있고, 서남쪽의 남문 밖으로는 한층 낮아진 능선 대지를 다시 두른 부곽(副郭)이 이중으로 외성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이 외곽의 서남쪽 능선을 따라 토루가 계속 이어져 행성(行城)을 이루며 보다 서남쪽의 염불산(念佛山) 봉수 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처음 백제(百濟)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로 당성군(唐城郡)이라 하였으나, 신라(新羅)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唐項城)이라 하고, 서해 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통하는 출입구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기록에는 이 산성을 고당성(古唐城)이라 하여 당항성과 관련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신라 하대(下代)에는 당성진(唐城鎭)이 설치되고, 신라의 왕도(王都)에서 상주와 삼년산성을 거쳐 이곳에 이르는 길을 당은포로(唐恩浦路)라 하였다.

이 성에는 남문터와 북문터가 정상부 아래의 기슭에 있고, 동문터와 수구터는 계곡 쪽에 있다. 수구터의 안쪽에는 지금도 샘이 있어 물이 사철 나오고, 주변에 건물터가 있다. 서벽에 연한 정상부에는 노목이 우거진 숲이 있고, 여기에 성황당(城隍堂)이 있다. 이밖에 망해루(望海樓)로 추정되고 있는 건물지에 초석들이 남아 있다. 한편 본성의 서남쪽에 이어진 외성은 성의 서남쪽의 제일 높은 곳에서 한층 낮아진 평탄 대지를 주머니 모양으로 둘러서 본성의 남문을 보호하는 옹성처럼 축조한 흔적을 찾을 수 있고, 둘레는 230m이다. 이 외성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낮아지는 곳에도 보다 작은 제2의 외성을 만들어 남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는 최소한 2개의 벽을 통과하여야 되도록 특수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제 2의 외성에서 계속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 성벽은 희미하긴 하지만 보다 남쪽의 안부(鞍部)를 지나 계속된다.

성벽은 석축된 벽체가 무너져 마치 토석혼축처럼 보이지만 당초 토축의 석축으로 개축되면서 쌓아 올린 석축의 일부가 남벽쪽에서 약간 남아 있고, 문터의 좌우와 성벽의 회절처(回折處)마다 곡성(曲城)을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당성 오르막길

당성 담벼락

당성 담벼락 오르막길

당성전경

당성 풀숲

당성전경

근경 돌담길

당성사적비

발굴 조사중 성벽

발굴 조사중

발굴조사 안내문

사적비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