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세워진 성이다.
성은 내성·중성·외성을 각각 다른 시기에 쌓았고, 성 안에는 별장을 두어 항상 수호케 하였다.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며 칠곡도호부도 이 산성내에 있었다. 내성은 인조 18년(1640)에 관찰사 이명웅의 건의로 쌓았으며, 칠곡도호부가 이 안에 있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가 왕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크다. 중요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4개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해서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외성은 숙종 26년(1700)에 왕명에 의해서 쌓았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때 절터가 많이 남아있다. 1960년의 집중 폭우로 문 윗쪽이 무지개처럼 굽은 홍예문이 파손되고 성벽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그 밖에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산산성은 험한 자연지세를 이용한 조선 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전문설명
이 산성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과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 外侵 >에 대비하기 위한 요새< 要塞 >로 축성된 것이다. 성내에서는 별장< 別將 >을 두어 항상 수호케 하고, 인근 지역 6개읍(경산< 慶山 >, 하양< 河陽 >, 신령< 新寧 >, 의흥< 義興 >, 의성< 義城 >, 군위< 軍威 >)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였고, 칠곡도호부< 漆谷都護府 >가 바로 이 산성내에 있었다. 내성: 인조< 仁祖 > 18년(1640) 관찰사< 觀察使 > 이명웅< 李命雄 >이 조정에 건의하여 축성하였으며, 당시 성의 규모와 시설은 다음과 같다. 성벽< 城壁 > 4,710보(약4km), 성문< 城門 > 3(동·서·북< 3(東·西·北 >), 암문< 暗門 > 8, 못 9, 우물 21, 장대< 將臺 > 2, 포루< 砲壘 > 4, 보루< 堡樓 > 5, 절< 寺 > 4(가흥< 架興 >, 정천< 淨泉 >, 통천< 通泉 >, 보국< 寶國 >), 기타 군영< 軍營 > 및 군창< 軍倉 >, 칠곡도호부가 내성 안에 있었다. 중성: 영조< 英祖 >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 鄭益河 >가 왕명을 받아 축조하였다. 내성의 안쪽에 있다. 성벽 602보(약 460m), 성문루< 城門樓 > 1(중성문< 中城門 >), 위려각< 衛藜閣 >(별장거소< 別將居所 >)외성: 숙종< 肅宗 > 26년(1700) 관찰사 이세재< 李世載 >가 왕명을 받아 축조하였다. 성벽 3,754보(약 3km), 성문 1(남문), 암문 3, 남창 1, 장적고< 帳籍庫 > 1, 절 1(천주사< 天柱寺 >)가산산성은 천험< 天險 >의 요새를 이용하여 3중< 三重 >의 성벽을 갖춘 것으로 성내에 많은 물이 있어서 산성입보< 山城入堡 >의 시설로서는 매우 바람직한 곳이었다.
가산산성근경 남문 남문옆수문 중문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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