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04호 서울 의릉

오늘의 쉼터 2008. 2. 19. 17:53



종     목 사적  제204호
명     칭서울 의릉 (서울 懿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434,386㎡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석관동 1-5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의릉관리소

일반설명

조선 20대 경종(재위 1720∼1724)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의 무덤이다. 경종은 희빈장씨의 소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이처럼 앞·뒤로 만든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영릉에서 처음 나타났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장명등·문무석과 말·양·호랑이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왕비릉의 석물 배치는 왕릉과 같으나 무덤 뒤에 담을 두르지 않았다.


전문설명

 

제20대(第20代) 경종대왕(景宗大王)과 동계비(同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릉(陵)이다. 경종대왕(景宗大王)은 숙종(肅宗)의 제1자(第1子)로서 숙종(肅宗) 14년(1688년) 춘추(春秋) 3세 되던 해 6월 16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숙종(肅宗) 43년(1717년) 8월 1일 숙종(肅宗)의 명(命)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으며, 숙종대왕(肅宗大王)이 숙종(肅宗) 46년(1720년) 6월 8일 경희궁(慶熙宮)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昇遐)함에 이 해 6월 13일 경희궁(慶熙宮)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春秋) 33세였다. 경종(景宗)의 사친(私親)인 대빈 장씨(大嬪 張氏)는 숙종(肅宗)의 후궁(後宮)으로서 희빈(禧嬪)의 위(位)에 있었고 경종(景宗) 탄생(誕生)후 숙종비(肅宗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가 폐출(廢出)되고 왕비(王妃)에 올랐으나 후일(後日) 민비(閔妃)를 무고(巫蠱), 저주(詛呪)한 사실(事實)이 밝혀져 폐비(廢妃)되고 경종(景宗)이 왕세자(王世子)로 있던 14세시(歲時)인 숙종(肅종) 27년(1701년)에 사친(私親)이 사사(賜死)되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경종(景宗)은 유시(幼時)로부터 병약(病弱)하였으며 등극(登極)후에도 다병(多病)하고 후사(後嗣)가 없어 즉위년(卽位年)(1720년) 8월 연잉군(延잉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冊封)하였으며 재위중(在位中)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당쟁(黨爭) 속에서 신축(辛丑)·임인옥사(壬寅獄事)를 겪으면서 경종(景宗) 4년(1724년) 8월 25일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37세였고 재위(在位) 4년이었다. 영조(英祖) 즉위년(卽位年)(1724년) 9월 3일 묘호(廟號)를 경종(景宗), 능호(陵號)를 의릉(議陵)이라 하였다. 이 해 12월 16일 양주(楊州) 남(南) 중량포(中梁浦)의 천장산(天藏山) 신좌인향(申坐寅向)(남서(南西)에서 북동향(北東向))에서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경종대왕(景宗大王)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는 본관(本貫)이 함종(咸從)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여(女)로서 숙종(肅宗) 31년(1705년) 10월 29일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완릉부부인(完陵府夫人) 이씨(李氏)이다. 숙종(肅宗) 44년(1718년) 2월 세자빈(世子嬪) 심씨(沈氏)가 훙거(薨去)함에 이 해 9월 13일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었고, 경종(景宗)이 즉위(卽位)함에 왕비(王妃)로 진봉(進封)되었으며 영조(英祖) 즉위년(卽位年)(1724년)에 왕대비(王大妃)로 올렸다. 영조(英祖) 6연(1730연) 6월 29일 경희궁(慶熙宮) 어조당(魚藻堂)에서 소생(所生) 없이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26세였다. 이 해 7월 6일 시호(諡號)를 선의(宣懿)라 하였고, 능호(陵號)를 의릉(懿陵)이라 하였으며, 10월 19일 천장산(天藏山) 신좌인향(申坐寅向)(남서(南西)에서 북동향(北東向)) 산줄기 경종릉(景宗陵) 아래에 예장(禮葬)하였다.

의릉(懿陵)은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雙陵)이며 좌우쌍릉(左右雙陵)이 아닌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니 여주(驪州) 효종(孝宗)의 영릉(寧陵)과 같은 형식(形式)이다. 왕(王)과 왕비(王妃)의 릉(陵)을 좌우(左右)로 봉릉(奉陵)하지 아니하고 상하(上下)로 한 것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의한 것이며, 좌우(左右)로 설릉(設陵)할 경우 능침(陵寢)이 정혈(正穴)을 벗어나 좌정(座定)케 되기 때문이다.

대왕릉(大王陵)엔 병풍석(屛風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12칸의 난간석(欄干石)을 설치(設置)하였으며, 난간석주(欄干石柱)에는 십이간지(十二干支)가 방위(方位)에 따라 문자(文字)로 새겨졌으며, 난간석(欄干石)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쌍이 외향(外向)하여 교호(交互) 배설(配設)되었고, 능침(陵寢) 앞에 상석(床石)이 1좌(座),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이 있으며, 3면의 곡장(曲墻)으로서 제1계(第1階)가 된다. 한 단 아래 제2계(第2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설치(設置)되었고, 중앙(中央)에 사각형(四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다. 그 한 단 아래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문인석(文人石)의 예(例)와 같이 배치(配置)되어 있다. 대왕릉(大王陵) 아래 왕비릉(王妃陵)엔 곡장(曲墻)이 설치되지 아니하였고, 난간석(欄干石), 수석(獸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명등석(明燈石), 문·무인석(文·武人石), 마석(馬石)의 상설(象設)은 대왕릉(大王陵)과 같다.

비릉(妃陵)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동북편(東北便)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경종대왕의릉(朝鮮國景宗大王懿陵) 선의왕후(宣懿王后) 하(下)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다.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재실(齋室)은 홍살문(紅箭門) 동북방(東北方) 도로변(道路邊)에 있었으나 고종(高宗)의 제3자(第3子)이며 조선조(朝鮮朝) 마지막 황태자(皇太子)였던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이은(李垠)이 1963년 일본(日本)에서 환국(還國)하고 1970년 5월 서거(逝去)함에 경기도(京畿道) 남양주시(南楊州市) 금곡동(金谷洞) 홍릉(洪陵)·유릉(裕陵) 경역내(境域內)에 영원(英園)을 조영(造營)한 후 1973년도에 영원재실(英園齋室)로서 이건(移建)되었으며, 재실지(齋室址)는 국악예술고등학교(國樂藝術高等學校) 교사부지(校舍敷地)로 사용(使用)되다가 지금은 일반주택단지(一般住宅團地)로 되었다.

의릉(懿陵) 경역(境域)은 1960년대 초 당시(當時)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에서 관리(管理)하면서 일부(一部)에 청사건물(廳舍建物)을 축조(築造) 사용(使用)하다가 1990년대에 이전(移轉)하였으며, 경역내(境域內)에는 현대식(現代式) 건조물(建造物)이 잔존(殘存)하여 있으나 능역(陵域)과 배치(背馳)되는 구조물(構造物)이므로 원래(原來)의 능역(陵域)이 회복(回復)되어야 할 것이다.




겨울 의릉전경

의릉 천장산의 봄꽃

무인석 두상

무인석

홍살문

정자각

왕릉 봉분

왕비릉근경

능비

정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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