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01호 서울 태릉과 강릉

오늘의 쉼터 2008. 2. 19. 15:55


종     목 사적  제201호
명     칭서울 태릉과 강릉 (서울 泰陵과 康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1,632,281㎡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 노원구  공능동 313-19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태릉관리소

일반설명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의 두번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본관은 파평으로 중종의 원부인인 장경왕후가 1515년 죽자 1517년에 17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중종이 있는 정릉에 묻히려 하였으나 장마철 침수로 인하여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무덤은 십이지신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12면으로 된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무덤 앞에는 상석·망주석 등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제작되었다.

무덤 아래에는 한국 전쟁시 훼손되었다가 1995년 다시 지은 정자각이 있다. 사람모양의 돌조각상(석인)은 4등신으로 입체감이 표현되지 않았는데, 당시 석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강릉은 조선 제13대 명종(재위 1545∼1567)과 그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씨(1532∼1575)의 무덤이다. 왕비가 죽은 후 왕의 옆에 무덤을 쓴 쌍릉의 형태를 하고있다. 태릉과 같은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며 돌로된 등인 장명등은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보여준다.


전문설명


태릉(泰陵)은 제11대(第11代) 중종대왕(中宗大王) 제2계비(第2繼妃) 문정왕후 윤씨(文政王后 尹氏)의 릉(陵)이다.

문정왕후 윤씨(文政王后 尹氏)는 본관(本貫)이 파평(坡平)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의 여(女)로서 연산군(燕山君) 7년(1501년) 10월 22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중종(中宗)의 제1계비(第1繼妃)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가 중종(中宗) 10년(1515년) 3월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産後病)으로 7일만에 승하(昇遐)하자 2년 후인 중종(中宗) 12년(1517년) 7월 19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니 춘추(春秋) 17세였다. 문정왕후(文政王后)는 소생(所生) 경원대군(慶原大君)이 인종(仁宗)의 대통(大統)을 이어 왕위(王位)에 나가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1545년) 인종(仁宗)의 외척(外戚)인 윤임 일파(尹任 一派) 대윤세력(大尹勢力)을 축출(逐出)하고 왕후(王后)의 친정(親庭)인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 일파(小尹 一派)가 득세(得勢)하는 을사화옥(乙巳禍獄)이 있었다. 봉은사 주지승(奉恩寺 住持僧) 보우(普雨)와 상론(相論)하여 성종(成宗)의 선릉 동강(宣陵 東岡)에 길지(吉地)가 있다하여 경기도 고양군(京畿道 高陽郡)의 중종 계비(中宗 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와 동원(同原)의 정릉(靖陵)을 천릉(遷陵)하여 후일 왕후(後日 王后)의 릉(陵)을 함께 하고자 명종(明宗) 17년(1562년) 9월 천봉(遷奉)하였던 것이나 하절(夏節) 홍수시(洪水時)에는 능소(陵所)까지 침수(浸水)되어 보토(補土)에 거액(巨額)을 허비(虛費)하였을 뿐 왕후릉(王后陵)은 양주 노원(楊州 蘆原)에 설릉(設陵)케 되었다. 왕후(王后)는 불심(佛心)이 깊어 유생(儒生)들의 반대(反對)를 무릅쓰고 승과(僧科)를 두었고 선·교 양종(禪 ·敎 兩宗)을 부활(復活)시키는 등 불교진흥(佛敎振興)에 진력(盡力)하였다.

명종(明宗) 20년(1565년)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昌德宮 昭德堂)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 (春秋) 65세였고 소생(所生)은 명종대왕(明宗大王)과 4녀를 두었다. 이 해 4월 12일 시호(諡號)를 문정(文定)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하였다가 6월 4일 태릉(泰陵)으로 고치고 7월 15일 양주 노원면 대방리(楊州 蘆原面 大邦里) 임좌병향(壬坐丙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능침(陵寢)에 병풍석(屛風石)은 12면으로 면석(面石)엔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과 운채(雲彩)를 새겼고, 병석(屛石) 위의 만석(滿石) 12개의 중간(中間)에 방위표시(方位表示)인 십이지(十二支)를 문자(文字)로 새겨 면석(面石)과 만석(滿石)의 방위(方位)를 함께 하고 있다. 난간석(欄干石)은 12칸이고 능전(陵前)에 상석(床石) 1좌(1座), 그 좌우 양측(左右 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 능침(陵寢)의 동서북방(東西北方)에 외향(外向)하여 교호배치(交互配置)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2쌍 및 3면의 곡장(曲墻)으로서 상계(上階)를 이루고 있다. 중계(中階)는 상면 설치(相面 設置)된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 1쌍, 그 중앙(中央)에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가 있으며 하계(下階)에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1쌍이 중계(中階)와 같은 형태(形態)로 설치(設置)되었다.

능제 상설(陵制 象設)은 국조오례의제(國朝五禮儀制)를 충실(充實)히 따르고 있으며 정자각(丁字閣)은 능침(陵寢) 언덕 아래에 있으며 6.25 당시(當時) 멸실(滅失)되었던 것을 1995년 복건(復建)한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으며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문정왕후태릉(朝鮮國文定王后泰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29년(1753년)에 세운 것이며 비각 남측(碑閣 南側)에 수직방(守直房)이 있다.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始作)되는 곳에 있다. 재실(齋室)은 홍살문 서남측(紅箭門 西南側)에 강릉(康陵)과 함께 한 재실(齋室)이 있었으나 1970년에 노후멸실(老朽滅失)되고 재실지(齋室址)는 태릉푸른동산 안의 수영장시설부지(水泳場施設敷地)로 되었다. 태릉(泰陵) 서편(西便)엔 태릉푸른동산에서 운영(運營)하는 일단(一團)의 사격시설(射擊施設)이 있다. 이 사격시설(射擊施設)은 1970년대 초에 대한사격연맹(大韓射擊聯盟)에서 개설(開設)하여 그간 많은 국내외 사격대회(國內外 射擊大會)가 개최(開催)되었고 우수(優秀)한 사격선수(射擊選手)가 수다(數多)히 배출(輩出)되었다고 하며 국내(國內) 유일(唯一)의 국제식 종합사격시설(國際式 綜合射擊施設)로서 외국(外國)에 비하여 손색(遜色)이 없다고 한다.

조선왕릉(朝鮮王陵)은 조선조(朝鮮朝)의 전통적(傳統的)인 능제(陵制)와 법식(法式)에 의하여 조영(造營)되었고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입각(立脚)한 것이지만 능지(陵地)는 주변 산세(周邊 山勢)와의 관계(關係), 지리적 여건(地理的 與件), 주위환경(周圍環境) 등을 모두 아울러서 택정(擇定)되고 이어 능역(陵域)이 이루어져 전래(傳來)되어 오는 것이다. 왕릉(王陵)을 이루는 능역(陵域)은 그 왕조(王朝)와 조영 시대(造營 時代)를 살필 수 있는 역사적 유적(歷史的 遺蹟)으로서 유한정정(幽閒靜貞)을 본래적 특성(本來的 特性)으로 하고 있는 것이니 능역(陵域)을 형성(形成)하는 능림(陵林)은 자연상태(自然狀態) 그 자체(自體)로서 눙역 구성요소(陵域 構成要素)인 것이고 능역(陵域)은 조영 당시(造營 當時)의 상태(狀態)가 보존 계승(保存 繼承)되어야 하며 인위적 가공(人爲的 加工)에 의한 변형(變形)은 곧 유적(遺蹟)의 훼손(毁損)이며 이는 한 시대(時代)의 문화(文化)를 파손(破損)함에 직결(直結)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격종목(射擊種目)은 현대(現代)에서 생활체육(生活體育)의 일부(一部)로 사격인구(射擊人口)가 증가(增加)하는 추세(趨勢)에 있다고 하나 사격시설(射擊施設)은 능역내(陵域內)에서 이질적(異質的)이기보다는 배타적 상태(排他的 狀態)에 있는 것이며 능역(陵域)은 본래(本來)의 상태(狀態)로 유지 보존(維持 保存)되어야 할 것이다.

강릉(康陵)은 제13대(第13代) 명종대왕(明宗大王)과 동비(同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의 릉(陵)이다.

명종대왕(明宗大王)은 중종(中宗)의 제2자(第2子)로 인종(仁宗)의 이복제(異腹弟)로서 중종(中宗) 29년(1534년) 5월 22일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환이고 자(字)는 대양(對陽)이며 모후(母后)는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이다. 중종(中宗) 34년 (1539년) 12월 21일 경원대군(慶原大君)에 봉(封)하여졌다가 인종(仁宗)이 병세(病勢) 위독(危篤)함에 인종 원년(仁宗 元年)(1545년) 유명(遺命)으로 전위(傳位)받아 이 해 7월 6일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니 춘추(春秋) 12세였다. 명종(明宗)이 유충(幼沖)하여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8년간 수렴청정(年間 垂簾聽政)을 하였으니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왕후(王后)의 제 윤원형 일파(弟 尹元衡 一派)인 소윤(小尹)이 집권(執權)하면서 외척(外戚)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었다. 척신(戚臣)에 의한 전횡(專橫)으로 왕권(王權)은 실추(失墜)되고 외척일족(外戚一族)의 수탈(收奪)로 민생(民生)이 피폐(疲弊)하고 사회(社會)가 불안(不安)한데, 거듭되는 흉년(凶年)으로 민심(民心)이 흉흉(兇兇)하여 전국각처(全國各處)에서 도적(盜賊)이 난립(亂立)하였으니 의도 임거정사건(義盜 林巨正事件)도 그중 하나이다. 모후(母后)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불교(佛敎)의 중흥(中興)이 있었으며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 등 거유석학(巨儒碩學)이 배출(輩出)되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승하(昇遐) 후 명종(明宗)은 척신정치(戚臣政治)의 폐해(幣害)를 척결(剔抉)하고자 인재(人材)를 균용(均用)하고 선정(善政)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한 채 명종(明宗) 22년(1567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景福宮 養心堂)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22년이었고 춘추(春秋) 34세였다. 원자 순회세자(元子 順懷世子)가 13세에 요절(夭折)하여 사왕(嗣王)이 없어 중종(中宗)의 제7자(第7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제3자(第3子) 균(鈞)이 승습(承襲)하니 후일(後日)의 선조대왕(宣祖大王)이다. 선조 즉위년(宣祖 卽位年)(1567년) 7월 7일 묘호(廟號)를 명종(明宗)이라 하였고 이 해 9월 22일 양주 노원면 대방동 금산(楊州 蘆原面 大邦洞 金山)의 해좌사향(亥坐巳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예장(禮葬)하고 능호(陵號)를 강릉(康陵)이라 하였다.

명종대왕비(明宗大王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는 본관(本貫)이 청송(靑松)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청릉부원군 심강(靑陵府院君 沈鋼)의 여(女)로서 중종(中宗) 27년(1532년) 5월 25일 탄생(誕生)하였으며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1545년)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명종(明宗) 22년(1567년) 6월 명종(明宗)이 승하(昇遐)하고 선조(宣祖)가 즉위(卽位)하였으나 유충(幼沖)하여 왕비(王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나 이듬해인 선조 원년(宣祖 元年)(1568년) 7월 철렴(撤簾)하였다. 선조(宣祖) 8년(1575년) 1월 2일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名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 44세(春秋 44歲)였다. 이 해 1월 11일 시호(諡號)를 인순(仁順)이라 하였고 4월 28일 강릉 동편(康陵 東便)에 동원이봉(同原異封)으로 예장(禮葬)하였다. 소생(所生)으로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있었으나 명종(明宗) 18년(1563년) 13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하였다.

강릉(康陵)은 동원쌍릉(同原雙陵)으로 병풍석(屛風石)은 대왕릉(大王陵)과 왕비릉(王妃陵)에 각 12면이 세워졌고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을, 우석(隅石)엔 운채(雲彩)를 새겼으며 만석(滿石)엔 십이지(十二支)의 방위(方位)를 문자(文字)로 새겼으니 태릉(泰陵)과 같다. 난간석(欄干石)은 각 12칸으로 합설(合設)하였으며 상석(床石)은 양릉(兩陵)에 각각 설치(設置)하였고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이 있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각 2쌍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교호 배치(交互 配置)되었고 3면의 곡장(曲墻)이 있다. 위 상계(上階) 아래로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 설치(相面 設置)되었으며 그 중앙(中央)에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가 있으며 중계(中階)를 이루고 있다. 하계(下階)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있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 동편(丁字閣 東便)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명종대왕강릉 인순왕후부좌(朝鮮國明宗大王康陵 仁順王后부左)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29년(1753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중간지역(中間地域)엔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에서 운영(運營)하는 태릉선수촌(泰陵選手村)이 있다. 이 체육시설(體育施設)은 1965년경에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에서 개촌(開村)하여 올림픽 등 각종 국제경기대회(國際競技大會)에 대비(對備)하여 우수선수(優秀選手) 양성(養成)을 위한 훈련시설(訓練施設)로 활용(活用)되어오고 있으며 체육(體育)의 진흥(振興) 및 체육인(體育人)의 요람(搖籃)으로서 국제대회(國際大會)에서 국위(國威)를 선양(宣楊)함에 크게 공헌(貢獻)한 바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설(施設) 또한 위의 사격시설(射擊施設)과 같이 문화유적보존(文化遺蹟保存)에 영향(影響)을 미치고 있다 할 것이며 능역(陵域)과 배치관계(背馳關係)에 있는 시설(施設)은 정비(整備)되어 원상(原狀)이 회복(回復)되어야 할 것이다.




강릉 병풍석

강릉 참도 박석

태릉 후경

강릉 전경

강릉 봉분

태릉 정자각

태릉 근경

강릉 근경

석인, 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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