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02호 김포 장릉

오늘의 쉼터 2008. 2. 19. 16:03



종     목 사적  제202호
명     칭김포 장릉 (金浦 章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516,955㎡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김포시  풍무동 산141-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장릉관리소

일반설명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인조 10년(1633)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보호석만 둘렀다. 무덤 아래에는 영조 29년(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부左)’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전문설명


추존왕(追尊王) 원종대왕(元宗大王)과 추존왕비(追尊王妃)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의 릉(陵)이다.

원종대왕(元宗大王)은 선조(宣祖)의 제5자(第5子)로서 선조(宣祖) 13년(1580년) 6월 22일 경복궁 별전(景福宮 別殿)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는 부이고 사친(私親)은 저경궁 인빈 김씨(儲慶宮 仁嬪 金氏)이다. 선조(宣祖) 20년 (1587년) 정원군(定遠君)으로 봉(封)하여졌고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시(蒙塵時) 호종(護從)한 공(功)으로 선조(宣祖) 37년(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封)하여졌다. 선조(宣祖) 승하(昇遐)로 이복형(異腹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卽位)한 후 동모형(同母兄) 임해군(臨海君) 등을 유배·사사(流配·賜死)시키는 등 왕위(王位)를 둘러싼 정쟁(政爭) 속에서 피화(被禍)되어 궁박(窮迫)히 지내다가 광해군(光海君) 11년(1619년) 12월 29일 호현방 만사(好賢坊 寓舍)에서 훙서(薨逝)하니 춘추(春秋) 40세였다.

이듬해 광해(光海) 12년 (1620년) 2월에 양주 곡촌리(楊州 谷村里)에 장례(葬禮)하였으며 정원군(定遠君)의 장자 능양군(長子 綾陽君)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王位)에 오르자 인조 즉위년(仁祖 卽位年)(1622년)에 대원군(大院君)`으로 봉(封)하여졌고 추숭(追崇)하여 원호(園號)를 흥경원(興慶園)으로 하였으며 인조(仁祖) 5년(1627년) 8월 27일 양주 곡촌리(楊州 谷村里)에서 김포(金浦)의 성산 자좌오향(城山 子坐午向)(정북에서 정남향)(正北에서 正南向) 언덕에 천장(遷葬)하였다. 인조(仁祖) 10년 (1632년) 3월 11일 흥경원(興慶園)을 장릉(章陵)으로 추봉(追封)하였고 같은 해 5월 19일 묘호(廟號)를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였다.

원종대왕(元宗大王)의 비(妃)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는 본관(本貫)이 능성(綾城)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된 능안부원군 구사맹(綾安府院君 具思孟)의 여(女)로서 선조(宣祖) 11년(1578년) 4월 17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선조(宣祖) 23년(1590년) 정원군(定遠君)과 가례(嘉禮)를 올리고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封)하여졌다. 인조 즉위년(仁祖 卽位年)(1622년)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진봉(進封)되었고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인조(仁祖) 4년(1626년) 1월 14일 경희궁 회상전(慶熙宮 會祥殿)에서 훙서(薨逝)하니 춘추(春秋) 49세였으며, 소생(所生)은 인조대왕(仁祖大王) 등 4남(男)이다. 이 해 5월 18일에 김포현 성산(金浦縣 城山)의 계좌정향(癸坐丁向)(북북동(北北東)에서 남남서향(南南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고 원호(園號)를 육경원(育慶園)이라 하였다. 인조(仁祖) 5년(1627년) 8월 원종(元宗)의 흥경원(興慶園)을 김포 성산(金浦 城山)으로 천릉(遷葬)할 때 그 동편(東便) 자좌오향(子坐午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 언덕에 천장(遷葬)하면서 흥경원(興慶園)이라 합칭(合稱)하였으며 대왕릉(大王陵)과 동원이봉(同原異封)으로 쌍릉(雙陵)이다. 인조(仁祖) 10년 (1632년) 5월 19일 원종(元宗)의 묘호(廟號)를 정할 때 익호(謚號)를 인헌(仁獻)이라 하였다.

장릉(章陵)은 병풍석(屛風石)을 양릉(兩陵) 모두 세우지 아니하고 릉침(陵寢) 아래로 얕은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난간석(欄干石) 또한 설치(設置)하지 아니하였다. 각 릉(陵) 앞에 상석 1좌(床石 1座)씩 모두 2좌(座)가 있으며 그 동서 양측(東西 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과 양릉(兩陵)의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쌍을 교호 배치(交互 配置)하였으며, 그 밖으로 삼면(三面)의 곡장(曲墻)이 있다. 병석(屛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설치(設置)하지 아니한 것은 추봉(追封)한 다른 왕릉(王陵)의 전례(前例)에 따른 것이며 석물(石物)만을 왕릉(王陵)으로 개비(改備)하였기 때문이다. 중계(中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을 상면 설치(相面 設置)하고 중앙(中央)에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다. 하계(下階)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문인석(文人石)과 같이 설치(設置)되었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부左)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29년(1753년)에 세운 것이다. 비각(碑閣) 아래에 수복방(守僕房)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남측 참도(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홍살문(紅箭門)으로부터 남측(南側) 아래로 내려오면 재실(齋室)이 있고 재실 서남측(齋室 西南側)에 연지(蓮池)가 있다.




장릉 정자각

장릉 비각

장릉 홍살문

재실 본채

재실 행랑채

재실 문간채

장릉원경

장릉전경

장릉근경

장릉

좌측망주석

우측망주석

좌측문인석

우측문인석

좌측무인석

우측무인석

좌측석마상

우측석마상


좌측석마상

우측석마상

좌측석양상

우측석양상

좌측석양상

우측석양상

좌측석호상

우측석호상

장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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