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예종·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문설명
광릉(光陵)은 제7대 세조대왕(第7代 世祖大王)과 동비 정희왕후 윤씨(同妃 貞熹王后 尹氏)의 릉(陵)이다.
세조대왕(世祖大王)은 세종(世宗)의 제2자(第2子)로서 태종(太宗) 17년(1417년) 9월 29일 경복궁(景福宮)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는 유(유)이고 자(字)는 수지(粹之)이며 모후(母后)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세종(世宗) 10년(1428년) 6월 16일 진평대군(晉平大君),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고쳐졌다가 세종(世宗) 27년(1445년) 2월 11일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조(世祖)는 자질(資質)이 명민 영특(明敏 英特)하고 성품(性稟)이 과단성(果斷性)이 있었으며 무예(武藝)에도 능(能)하고 도한 학문(學文)을 숭상(崇尙)하였다. 단종 원년(端宗 元年)(1453년) 10월 10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영의정 황보인(領議政 黃甫仁), 좌의정 김종서(左議政 金宗瑞) 등과 역모(逆謀)를 꾀한다는 이유(理由)로 김종서(金宗瑞), 황보인(黃甫仁) 등을 격살(擊殺)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江華)로 유배(流配)시키는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그 다음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領經筵書雲觀事兼判吏兵曹事)가 되어 병정(兵政)을 장악(掌握)하였으며 단종(端宗) 3년(1455년) 금성대군(錦城大君) 등이 모반(謀反)을 일으킨다고 하여 유배(流配)하였고 이 해 윤6월(閏6月) 11일 단종(端宗)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 39세(春秋 39歲)였다. 세조(世祖)는 군제(軍制)를 개혁(改革), 집현전(集賢殿)을 없애는 등 왕권(王權)을 강화(强化)하는 한편 국방(國防)의 강화(强化), 토지제도(土地制度)의 정비(整備)와 많은 서적(書籍)을 편찬 간행(編纂 刊行)하였으니 《동국통감(東國統監)》,《국조보감(國朝寶鑑)》,《경제육전(經濟六典)》을 찬수(纂修)케 하였고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주역구결(周易口訣)》,《대명율강해(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등을 발간(發刊)하는 등 재위중 치적(在位中 治績) 이 있었으며 중앙집권(中央執權)에 의한 왕정안정(王政安定)은 후일 성종대(後日 成宗代)에 이르러 문화발전(文化發展)의 소지(素地)가 된다.
세조(世祖) 14년(1468년) 9월 7일 왕세자(王世子)에게 전위(傳位)하고 그 익일(翌日)인 8일 수강궁 정전(壽康宮 正殿)에서 병고(病故)로 승하(昇遐)하니 재위 14년(在位 14年)이었고 춘추 52세(春秋 52歲)였다. 예종 즉위년(睿宗 卽位年)(1468년) 9월 25일 릉호(陵號)를 광릉(光陵)으로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 하였고 11월 28일 양주치소 풍양현 직동(楊州治所 豊壤縣 直洞)의 주엽산하 자좌오향(注葉山下 子坐午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세조대왕(世祖大王)의 비 정희왕후 윤씨(妃 貞熹王后 尹氏)는 본관(本貫)이 파평(坡平)으로 영의정부사 영평부원군 윤번(領議政府使 鈴平府院君 尹)의 여(女)로서 태종(太宗) 18년(1418년) 11월 11일 강원도 홍천 관아(江原道 洪川 官衙)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흥영부대부인 이씨(興寧府大夫人 李氏)이다. 세종(世宗) 10년(1428년)에 세조(世祖)와 가례(嘉禮)를 올리고 악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으로 봉(封)해졌다가 세조 원년(世祖 元年)(1455년) 7월 20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덕종(德宗)과 예종(睿宗)을 낳았으며 세조(世祖)의 원자 의경세자(元子 懿敬世子)가 20세에 요서(夭逝)하자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함에 즉위년(卽位年)(1468년) 9월 7일 왕대비(王大妃)로 되었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니 조선왕조 최초(朝鮮王朝 最初)의 렴정(簾政)이었다. 예종(睿宗)이 재위 1년 2개월(在位 1年 2個月)만에 승하(昇遐)하니 대비(大妃)는 덕종(德宗)의 제2자 자을산군(第2子 者乙山君)으로 하여금 승통(承統)케 하였으니 바로 성종(成宗)이다. 성종(成宗)이 춘추 13세(春秋 13歲)로 왕위(王位)에 나감에 성종 즉위년(成宗 卽位年)(1469년)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성종(成宗) 2년(1471년) 1월 18일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올렸고 7년 뒤인 성종(成宗) 7년(1476년)에 렴정(簾政)을 거두었다.
성종(成宗) 14년(1483년) 3월 30일 온양행궁(溫陽行宮)에서 병환(病患)으로 승하(昇遐)하니 춘추 66세(春秋 66歲)였다. 이 해 5월 25일 시호(諡號)를 정희왕후(貞熹王后)로 하였고 6월 12일 광릉 동강 축좌미향(光陵 東岡 丑坐未向)(북북동(北北東)에서 남남서향(南南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광릉(光陵)은 왕(王)과 왕비릉(王妃陵)을 동원이강(同原異岡)에 봉릉(封陵)하고 양릉(兩陵)의 중간지역(中間地域)에 하나의 정자각(丁字閣)을 세웠으며 조선왕릉 최초(朝鮮王陵 最初)의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의 설릉(設陵)이다. 제5대 문종(第5代 文宗)의 현릉(顯陵)이 왕(王)과 왕비(王妃)의 릉(陵)이 동원이강 형식(同原異岡 形式)을 취(取)하고 있으나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의 소릉(昭陵)이 중종(中宗) 8년(1513년) 안산(安山)에서 천릉(遷陵)한 후 정자각(丁字閣)을 양측 중간(兩側 中間)으로 이건(移建)한 것이므로 동원이강 설릉(同原異岡 設陵)은 광릉(光陵)에서 처음 보게 된다. 왕릉(王陵)은 병풍석(屛風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세조(世祖)의 릉원(陵園)에 석실(石室)과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는 유명(遺命)에 의한 것이며 이후 현궁(玄宮)의 석실(石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었으니 광릉(光陵)은 조선초기 릉제(朝鮮初期 陵制)에 변혁(變革)을 이루는 전환기(轉換期)가 되었던 것이며 석실(石室)과 병석(屛石)의 폐지(廢止)로 민고(民苦)와 국비(國費)를 크게 감축(減縮)하게 되었다.
릉침 주위(陵寢 周圍)로 난간석(欄干石)을 세웠으며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게 됨으로써 병석(屛石)에 새겼던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은 난간석(欄干石)의 동자석주(童子石柱)에 새겼다. 난간석(欄干石)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각 2쌍 교호 배치(各 2雙 交互 配置)하였고 릉전(陵前)엔 상석 1좌(床石 1座)와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이 1쌍(雙)이 있으며 삼면(三面)의 곡장(曲墻)이 둘러싸고 있다. 그 한 단 아래 중앙(中央)에 명등석 1좌(明燈石 1座)와 동서 양측(東西 兩側) 에 문인석 1쌍(文人石 1雙)과 마석 1쌍(馬石 1雙)이 상면 설치(相面 設置)되었고 다시 한 단 아래에 무인석(武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문석(文石)의 례(例)와 같이 배설(配設)되었다. 동강(東岡)에 비릉(妃陵)도 왕릉(王陵)과 같이 곡장(曲墻), 난간석(欄干石), 수석(獸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명등석(明燈石), 문(文) 무인석(武人石) 및 마석(馬石)이 있다.
정자각(丁字閣)은 양릉(兩陵) 언덕 아래에 있고 비각(碑閣)은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세조대왕광릉 정희왕후부좌강(朝鮮國世祖大王光陵 貞熹王后府左岡)이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31년(1755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남측 삼도(丁字閣 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재실(齋室)은 동남측(東南側)에 있다.
광릉림(光陵林)은 원래 2백여만평(原來 2百餘萬坪)에 이르는 광활(光)한 산림(山林)이었는데 일정시 조선총독부(日政時 朝鮮總督府)에서 임업시험림(林業試驗林)으로 만들면서 현 광릉림 32만여평(現 光陵林 32萬餘坪)을 두었으며 시험림(試驗林)은 현 산림청 산하 임업연구원 관할(現 山林廳 傘下 林業硏究院 管轄)이다.
봉분 광릉전경 왕릉근경 왕비릉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