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을 하고 있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녕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녕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녕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전문설명 영릉(英陵)은 제4대 세종대왕(第4代 世宗大王)과 동비 소헌왕후 심씨(同妃 昭憲王后 沈氏)의 릉(陵)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태종(太宗)의 제3자(第3子)로서 태조(太祖) 6년(1397년) 4월 10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漢城府 北部 俊秀坊)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도()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모후(母后)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이다. 태종(太宗) 8년(1408년) 2월 11일 충녕군(忠寧君)에 봉(封)해졌다가 태종(太宗) 12년(1412년) 5월 3일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이 해 8월 8일 태종(太宗)의 선위(禪位)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으며 춘추(春秋) 21세였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역사(歷史) 문화(文化) 등 각 분야(分野)에 대한 통찰력(洞察力)과 판단력(判斷力), 학문적 노력(學問的 努力)을 겸전(兼全)하였고 천성(天性)이 관후 강건(寬厚 强健)하고 자질(資質)이 총민(聰敏), 독실(篤實)하였으며 태종대(太宗代)의 안정(安定)된 왕정(王政)을 기반(基盤)으로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등의 명사(名相) 이종무(李從茂) 김종서(金宗瑞) 등 무신(武臣),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등 현재(賢才)의 보필(輔弼)을 받아 조선문화 황금기(朝鮮文化 黃金期)를 이룩한 영주(英主)요 성군(聖君)이었다. 서운관(書雲館)을 설치(設置) 장영실(張英實)을 주도(主導)로 한 천문기계(天文器械)의 계발(啓發), 박연(朴堧)에 의한 음악체계(音樂體系)의 정비(整備), 경제육전(經濟六典)의 반포(頒布), 《농사직설(農事直說)》,《고려사(高麗史)》,《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의방유취(醫方類聚)》등 각 방면(各 方面)의 서적 찬간(書籍 纂刊)이 있었고 육진(六鎭)의 개척(開拓), 대마도 정벌(對馬島 征伐) 등 내정(內政)과 외치(外治)에 헤아릴 수 없는 치적(治績)이 있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는 불후(不朽)의 업적(業績)이다.
세종(世宗) 32년(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제 동별궁(私第 東別宮)에서 환후(患候)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54세였고 재위(在位) 32년이었다. 문종(文宗) 즉위년(卽位年)(1450년) 5월 21일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으로 릉호(陵號)를 영릉(英陵)이라 하였다. 이 해 6월 12일 경기도 광주 대모산(京畿道 廣州 大母山) 아래 헌릉(獻陵) 서쪽 산줄기 소혜왕후 심씨(昭惠王后 沈氏)의 영릉 서실(英陵 西室)에 합장(合葬)하니 이는 유명(遺命)에 의한 것이다. 세종(世宗) 28년(1446년) 3월 24일 소혜왕후 심씨(昭惠王后 沈氏)가 승하(昇遐)함에 헌릉 서강(獻陵 西岡)에 장사(葬事)지내고 영릉(英陵)이라 하였으며 현궁(玄宮)은 같이 하고 석실(石室)은 달리하여 동실(東室)은 왕후(王后)의, 서실(西室)은 대왕(大王)의 수실(壽室)로 하였던 것이며 대왕(大王)의 승하(昇遐)로 합장(合葬)하였던 것이니 조선왕릉 중 최초(朝鮮王陵 中 最初)의 동봉이실(同封異室)의 합장릉(合葬陵)이다.
이후 영릉 불길론(英陵 不吉論)이 있어 천릉(遷陵)이 거론(擧論)되었으나 실현(實現)을 보지 못하다가 예종(睿宗) 즉위년(卽位年)(1468년) 12월 경기도 여주 서방 북성산(京畿道 驪州 西方 北城山)의 이계순(李季旬)의 묘소지(墓所地)로 천릉(遷陵)키로 정(定)하고 그 이듬해 3월 6일 지금의 여주 신릉(驪州 新陵)으로 천릉(遷陵)하였다. 구릉(舊陵)의 상석(床石), 명등석(明燈石), 망주석(望柱石), 문(文) 무인석(武人石), 마석(馬石), 신도비(神道碑) 등은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도에 이화대학교 박물관(梨花大學校 博物館)에 의해 발굴(發掘)되어 그 일부(一部)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東大門區 淸凉里洞 世宗大王記念館)에서 보존(保存)하고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두전(頭篆)을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라 하였고 비명(碑銘)과 음기(陰記)는 풍화(風化)와 마모(磨耗)가 심(甚)하여 수십여자(數十餘字)를 판독(判讀)할 수 있을 뿐이다.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世宗大王妃 昭憲王后 沈氏)는 본관(本貫)이 청송(靑松)으로 영의정부사 청천부원군 심온(領議政府事 靑川府院君 沈溫)의 여(女)로서 태조(太祖) 4년(1395년) 9월 28일 양주 사제(楊州 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삼한국대부인 안씨(三韓國大夫人 安氏)다. 태종(太宗) 8년(1408년) 2월 16일 충녕군(忠寧君)에 출가(出嫁)하고 그 익일(翌日)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封)하여졌으며 태종(太宗) 18년(1418년) 6월 17일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됨에 경빈(敬嬪)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세종(世宗) 즉위년(卽位年)(1418년)에 공비(恭妃)로 책봉(冊封)되었고 동(同) 14년(1432년)에 왕비(王妃)로 개봉(改封)되었다. 소생(所生)으론 문종(文宗) 등 8남2녀를 두었고 환고(患故)로 세종(世宗) 28년(1446년) 3월 24일 수양대군 제택(首陽大君 第宅)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52세였다. 시호(諡號)를 소헌(昭憲)이라 하고 이 해 7월 19일 경기도 광주 헌릉 서강(京畿道 廣州 獻陵 西岡)에 예장(禮葬)하고 릉호(陵號)를 영릉(英陵)이라 하였다. 세종(世宗) 32년(1450년) 2월 세종(世宗)이 승하(昇遐)함에 그해 6월 영릉(英陵)에 합장(合葬)하였다가 예종 원년(睿宗 元年)(1469년)에 현 여주 영릉 자좌오향(現 驪州 英陵 子坐午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 언덕으로 천릉(遷陵)하였다.
영릉(英陵)은 조선왕릉(朝鮮王陵) 최초(最初)의 합장릉(合葬陵)으로서 릉침(陵寢)에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현궁(玄宮)의 석실제도(石室制度)는 회격(灰隔)으로 바뀌었으니 개천 영릉(改遷 英陵)의 조영년대(造營年代)가 예종 원년(睿宗 元年)으로서 예종(睿宗)의 부왕 세조(父王 世祖)의 광릉 조영시(光陵 造營時)(1468년) 세조(世祖)의 유명(遺命)으로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석실(石室)을 회격(灰隔)으로 바꾼 뒤여서 이를 따랐던 것이다. 릉침 주위(陵寢 周圍)로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동자석주(童子石柱)엔 광릉(光陵)이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을 부조(浮彫)하였으나 영릉(英陵)에선 문자(文字)로 바뀌었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쌍(雙)이 교호배치(交互配置)되고 릉전(陵前)에는 상석(床石) 2좌(座)를 설치(設置)하였다. 상석 양측(床石 兩側)으로 망주석(望柱石) 1쌍(雙)이 설치(設置)되었으며 3면(面)의 곡장(曲墻)이 있다. 한단 아래에 문인석(文人石), 마석(馬石) 각 1쌍(雙)이 상면 배치(相面 配置)되고 그 중앙(中央)에 명등석(明燈石) 1좌(座)로 중계(中階)인 제2계(階)가 이루어졌고 그 아래에 무인석(武人石), 마석(馬石) 각 1쌍(雙)이 문석(文石)의 례(例)와 같이 배열(配列)되어 제3계(階)인 하계(下階)를 이루었으며 릉상(陵上) 및 상설(象設)은 단릉(單陵)의 형식(形式)이다. 릉(陵)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엔 비각(碑閣)이 있다. 구 영릉(舊 英陵)의 신도비(神道碑)는 이곳 천릉시 영릉지(遷陵時 英陵址)에 묻었으며 신비(新碑)는 영조(英祖) 21년(1745년)에 세운 것으로서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 좌(朝鮮國世宗大王英陵 昭憲王后 左)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다. 비각 남측(碑閣 南側) 아래로 수직방(守直房)이 있으며 정자각 서측(丁字閣 西側)엔 수자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 남측 삼도(丁字閣 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홍살문 서남방(紅箭門 西南方)에 방형(方形)의 연지(蓮池)가 있고 더 남측(南側)으로 내려와 영릉 참배로 옹편(英陵 參拜路 東便)에 재실(齋室)이 있으며 1972년에 복원(復元)된 것이다. 1977년도 대통령(大統領)의 지시(指示)로 영릉정화사업(英陵淨化事業)이 있었으며 훈민문(訓民門), 세종대왕동상(世宗大王銅像), 세종전(世宗殿) 등은 이때에 세운 것이다.
녕릉(寧陵)은 제17대 효종대왕(第17代 孝宗大王)과 동비 인선왕후 장씨(同妃 仁宣王后 張氏)의 릉(陵)이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은 인조(仁祖)의 제2자(第2子)로서 광해군(光海君) 11년(1619년) 5월 22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漢城府 中部 慶幸坊)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 호(號)가 죽오(竹梧)이며 모후(母后)는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이다. 인조(仁祖) 4년(1626년)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封)하여졌으며 병자호란 후(丙子胡亂 後)인 인조(仁祖) 15년(1637년) 왕세자(王世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淸)의 심양(瀋陽)에 인질(人質)로 있다가 인조(仁祖) 23년(1645년) 환국(還國)하였으며 이 해 4월 26일 형(兄)이며 왕세자(王世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병서(病逝)함에 9월 17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인조(仁祖) 27년(1649년) 5월 인조(仁祖)가 승하(昇遐)함에 이 해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효종(孝宗)은 대군시절(大君時節) 청(淸)의 심양(瀋陽)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있으면서 고초(苦楚)를 겪었고 부왕 인조(父王 仁祖)의 삼전도치욕(三田渡恥辱)을 설욕(雪辱)하고자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세우고 이를 추진(推進)하였으나 재정(財政)의 빈약(貧弱)과 청(淸)의 강성(强盛)으로 북벌(北伐)을 실행(實行)하지 못하였고 임진(壬辰) 정유왜란(丁酉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피폐(疲弊)한 민생(民生)의 안정(安定)을 위하여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 근해지역(全羅道 近海地域)에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擴大 實施)하였으며 필생(畢生)의 간원(懇願)이던 북벌(北伐)을 실행(實行)치 못한 채 효종(孝宗) 10년(1659년)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10년이었고 춘추(春秋) 41세였다.
현종(顯宗) 즉위년(卽位年) (1659년) 5월 11일 묘호(廟號)를 효종(孝宗)이라 하고 릉호(陵號)를 녕릉(寧陵)이라 하였으며 이 해 10월 29일 양주 건원릉 서측(楊州 健元陵 西側) 산줄기에 예장(禮葬)하였다. 녕릉 석물(寧陵 石物)에 틈이 생겨 릉침(陵寢)의 누수우려(漏水憂慮)로 인한 천릉론(遷陵論)에 따라 현종(顯宗) 14년(1673년) 10월 7일 여주 영릉 동측(驪州 英陵 東側) 언덕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에 천릉(遷陵)하였으며 천릉(遷陵)에 앞서 릉역내(陵域內)의 민가(民家)와 총묘(塚墓)를 옮기게 하였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의 비 인선왕후 장씨(妃 仁宣王后 張氏)는 본관(本貫)이 덕수(德水)로 우의정 신풍부원군 장유(右議政 新豊府院君 張維)의 녀(女)로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산 촌사(京畿道 安山 村舍)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영가부부인 김씨(永嘉府夫人 金氏)이다. 인조(仁祖) 23년(1645년) 효종(孝宗)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됨에 9월 27일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었고 효종(孝宗) 즉위년(卽位年)(1649년) 5월 13일 왕비(王妃)로 진봉(進封)되었으며 현종(顯宗) 즉위년(卽位年)(1659년) 5월 9일 왕대비(王大妃)로 되었다. 현종(顯宗) 15년(1674년) 2월 24일 경희궁 회상전(慶熙宮 會祥殿)에서 승하(昇遐)하였으니 춘추(春秋) 57세였으며 소생(所生)은 현종(顯宗)을 비롯한 1남6녀(1南6女)다. 이 해 3월 2일 시호(諡號)를 인선(仁宣)이라 하였으며 6월 4일 효종릉(孝宗陵) 아래 자좌오향(子坐午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에 장례(葬禮)지냈다.
현종(顯宗) 14년(1673년) 효종(孝宗)의 영릉(寧陵) 을 양주 검엄산(楊州 儉嚴山)에서 천봉(遷奉)한 익년 인선왕후(翌年 仁宣王后)의 릉(陵)을 영릉 영역(寧陵 塋域)에 봉릉(奉陵)함에 있어 양릉(兩陵)을 좌우(左右)로 나란히 하지 아니하고 왕릉(王陵)의 아래에 설릉(設陵)하여 왕(王)과 비(妃)의 릉(陵)이 상하(上下)로 쌍릉 형식(雙陵 形式)을 취(取)하고 있으니 이는 풍수지리상 생기왕성(風水地理上 生氣旺盛)한 정혈(正穴)에 릉침(陵寢)을 두고자 한 것으로서 양릉(兩陵)을 좌우(左右)로 설릉(設陵)할 경우 정혈(正穴)에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원상하이봉릉(同原上下異封陵)은 조선왕릉 중 최초(朝鮮王陵 中 最初)의 형태(形態)이고 제20대 경종대왕(第20代 景宗大王) 의 의릉(懿陵)이 또 한 예(例)이다.
개천 영릉(改遷 寧陵)의 왕릉(王陵)엔 3면(面)의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고 릉침(陵寢)엔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설치(設置)하고 동자석(童子石)에 십이방위 문자(十二方位 文字)를 새겼다. 이는 조선조 릉제상(朝鮮朝 陵制上) 한 전환기(轉換期)가 되었으니 여주(驪州)의 천장 영릉(遷葬 英陵)과 양주 광릉(楊州 光陵)으로부터 세조(世祖)의 유교(遺敎)로 릉침(陵寢)에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다가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서 다시 시작된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이 새겨진 병석 설치제도(屛石 設置制度)가 영릉(寧陵)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며 또 하나가 현실 회격(玄室 灰隔) 바닥에 지회(地灰)를 깔게 된 것이며 병석(屛石)은 조선 말기 홍릉(朝鮮 末期 洪陵)과 유릉(裕陵)에서 있게 된다. 난간석(欄干石) 밖으로 양석(羊石), 호석 각 2쌍(虎石 各 2雙)이 외향 배치(外向 配置)되고 릉전(陵前)에 상석(床石)이 1좌(座), 그 양측(兩側)으로 망주석 1쌍(望柱石 1雙)이 설치(設置)되어 상계(上階)를 이루고 한 단 아래 중계(中階)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과 중앙(中央)에 명등석 1좌(明燈石 1座)가 있으며 하계(下階)에는 무석(武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문석(文石)과 같은 배열(配列)로 설치(設置)되어 있다. 왕릉(王陵) 아래의 비릉(妃陵) 곡장(曲墻)만 설치(設置)되어 있지 아니할 뿐 릉상 의물(陵上 儀物)은 왕릉(王陵)과 같이 되어 있어 단릉(單陵)의 형태(形態)를 갖추고 있다. 정자각(丁字閣)은 비릉(妃陵) 언덕 아래에 있고 비각(碑閣)은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있으며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서 조선국효종대왕녕릉(朝鮮國孝宗大王寧陵)이라 썼으며 음기(陰記)는 인선왕후부장재하(仁宣王后 葬在下)라 썼다. 정자각 남측 삼도(丁字閣 南側 三道) 시작 부분(部分)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는데 홍살문(紅箭門)과 정자각(丁字閣) 사이에 삼도(三道)를 가로 질러 금천(禁川)이 흐르고 있는 바 금천(禁川)은 홍살문(紅箭門) 밖으로 흐름이 상례(常例)임이 비(比)하여 특이(特異)하다. 홍살문(紅箭門) 아래의 소로 동편(小路 東便)에 영릉 재실(寧陵 齋室)이 있다.
세종전 및 세종대 천문과학기기 영릉(英陵) 수복방 영릉(英陵) 수라간 영릉(英陵) 비각 영릉(英陵) 정자각 영릉(英陵) 영릉(英陵)-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 영릉(寧陵) 전경 영릉(寧陵) 재실 영릉(寧陵) 비각 영릉(寧陵) 정자각 영릉(寧陵) 수라간 영릉(寧陵) 수복방 영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 영릉입구 영릉전경-세종대왕 영릉근경 세종전 영릉전경-효종대왕 세종전전시물 세종전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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