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94호 서울 헌릉과 인릉

오늘의 쉼터 2008. 2. 19. 12:53


종     목 사적  제194호
명     칭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1,193,071㎡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헌릉관리소

일반설명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 2년(1400)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토지와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도 개혁하였으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국정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초기의 민생안정을 이룩하였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이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헌릉은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인석·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시대의 현릉·정릉, 조선시대의 후릉과 같이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었다.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고 비각을 세웠다. 세종 2년(1420)에 원경왕후가 죽음으로써 무덤지역을 정하였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에 따라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하였다.

인릉은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가 혼란했다.

인릉은 무덤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문·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언덕 아래에는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원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재실은 무덤과 같은 지역에 있는데 헌릉·인릉의 재실은 서로 떨어져 있다.


전문설명


헌릉(獻陵)은 제3대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동비 원경왕후 민씨(同妃 元敬王后 閔氏)의 릉(陵)이다. 태종(太宗)은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제5자로서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 16년(1367년) 5월 16일 함흥부 후주(咸興府 厚州)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방원(芳遠)이고 자(字)가 유덕(遺德)이며 모후(母后)는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이다. 고려 우왕(高麗 禑王) 8년(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오르고 이어 벼슬이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고려(高麗)의 명운(命運)이 이미 다하고 공양왕(恭讓王)이 실덕(失德)함에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과 함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창(主唱)하고 부왕 이성계(父王 李成桂)를 추대(推戴)하여 1392년 7월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업(創業)하게 하니 개국(開國)에 공(功)이 컸다. 태조(太祖) 원년(元年)(1392년) 8월 7일 정안군(靖安君)에 봉(封)해졌고 왕위계승권(王位繼承權)을 둘러싼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을 주도적(主導的)으로 평정(平定)한 정안군(靖安君)은 제2차 왕자(王子)의 난(亂)을 진압(鎭壓)하고 정종(正宗) 2년(1400년) 2월 4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이 해 11월 13일 선양(禪讓)을 받아 송경 수창궁(松京 壽昌宮)에서 등극(登極)하였다.

토지(土地) 조세제도(租稅制度)의 정비(整備), 국방 강화(國防 强化)를 위한 군사제도(軍事制度)의 혁신(革新), 개국이념(開國理念)이었던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 등 국정 전반(國政 全般)에 대한 개혁(改革)을 단행(斷行)함으로써 민생(民生)의 안정(安定)과 고려정치(高麗政治)의 잔재(殘滓)를 청산(淸算)함에 주력(注力)하였고 개국공신(開國功臣), 척신(戚臣) 등의 배제(排除)로 왕권(王權)을 강화(强化)하고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확립(確立)함으로써 건국 초기(建國 初期)의 왕정(王政)과 민생(民生)의 안정(安定)을 이룩하였으며 이 기반(基盤)은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조선왕조 문명발전(朝鮮王朝 文明發展)의 모태(母胎)가 된다. 태종(太宗) 4년 (1404년) 경복궁(景福宮)이 준공(竣工)됨에 국도(國都)를 송경(松京)에서 한양(漢陽)으로 재천도(再遷都)하여 서울은 조선조(朝鮮朝)의 왕도(王都)로 되었다. 태종(太宗) 18년(1418년) 8월 8일 세종(世宗)에게 양위(讓位)하고 세종(世宗) 4년(1422년) 5월 10일 연화방 신궁(蓮花坊 新宮)에서 붕서(崩逝)하니 춘추(春秋) 56세였고 왕위(王位)에 있은지 18년이었으며 상왕위(上王位)에 있은지 4년이었다. 이 해 9월 2일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고 릉호(陵號)를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9월 6일 광주부 치소 대모산 원경왕후 민씨(光州府 治所 大母山 元敬王后 閔氏)의 헌릉 서측 건좌손향(獻陵 西側 乾坐巽向)(북서(北西)에서 남동향(南東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으며 이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비 원경왕후 민씨(妃 元敬王后 閔氏)는 본관(本貫)이 여흥(驪興)이고 여흥부원군 민제(驪興府院君 閔霽)의 여(女)로서 공민왕(恭愍王) 14년(1366년) 7월 11일 송경 철동 사제(松京 鐵洞 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삼한국대부인 송씨(三韓國大夫人 宋氏)이다. 고려 우왕(高麗 禑王) 8년 (1383년) 태종(太宗)에게 출가(出嫁)하고 태종(太宗)의 왕위 수선(王位 受禪)에 내조(內助)가 컸다. 태조 즉위년(太祖 卽位年)(1392년)에 정녕옹주(靜寧翁主)에 봉(封)하여졌고 정종(正宗) 2년(1400년) 3월 14일 세자 정빈(世子 靜嬪으로 책봉(冊封)되었으며 태종(太宗)이 즉위(卽位)함에 정비(靜妃)로, 세종 즉위년(世宗 卽位年)(1418년) 11월 8일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진호(進號)되었으며 세종(世宗) 2년(1420년) 7월 10일 수강궁 별전(壽康宮 別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주(春秋) 56세였고 중궁위(中宮位)에 있은지 21년이었으며 소생(所生)은 4남4녀이다. 이 해 8월 25일 릉호(陵號)를 헌릉(獻陵)이라 하고 9월 14일 익호(謚號)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 하였으며 9월 17일 광주(廣州) 고을의 대모산하 건좌손향(大母山下 乾坐巽向)(북서(北西)에서 남동향(南東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헌릉(獻陵)은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雙陵)이다. 양릉 릉침(兩陵 陵寢)은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세웠으며 병풍석(屛風石)은 각 릉(陵) 12면으로 면석(面石)에는 와형운문(渦形雲紋) 속에 수관인신(獸冠人身)을 양각(陽刻)하였고 우석(隅石)과 면석(面石) 아래쪽엔 영지(靈芝)를, 우석(隅石)의 위쪽 우측(右側)엔 영저(靈杵)를 좌측(左側)엔 영탁(靈鐸)을 새겼다. 이는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의 례(例)를 따른 것이다. 그 밖으로 각 릉(陵)에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러 서로 연결(連結)하였다. 인석(引石)의 밖으로 면(面)한 부분(部分)에 목단(牧丹), 국화(菊花) 등을 새겨 모두 24개를 배설(配設)하였고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4쌍으로 1쌍씩 교호(交互)하여 릉침(陵寢)의 동(東) 서(西) 북측(北側)으로 모두 16좌(座)를 외향 배치(外向 配置)하였으며 5개의 고석(鼓石)에 바친 상석(床石)은 2좌(座)로 각 릉(陵) 앞에 있고 상석(床石)의 동서 양측(東西 兩側)으로 망주석(望柱石) 1쌍이 설치(設置)되었으며 릉침(陵寢)과 석물(石物)들을 호위(護衛)하여 동(東) 서(西) 북측(北側)에 3면의 곡장(曲墻)이 설치(設置)되었고 이로써 릉상(陵上) 1계(階)가 이루어졌다. 그 아래로 한 단 낮추어 제2계(階)인 중계(中階)엔 관대(冠帶)를 입은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동측(東側)에서 서향(西向)으로 똑같은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서측(西側)에서 동향(東向)으로 상면 배치(上面 配置)되었고 그 중간(中間)의 상석(床石) 앞에 팔각형 명등석(八角形 明燈石) 2좌(座)가 각 릉(陵)에 설치(設置)되어 중계(中階)가 이루어졌다. 다시 그 한 단 아래에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4좌(座)가 문인석(文人石)의 례(例)와 같이 상면 설치(上面 設置)되어 제3계(階)인 하계(下階)를 이루고 있다. 릉침(陵寢)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이는 정종(正宗)의 후릉(厚陵)의 상설(象設)과 같다.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세종(世宗) 6년(1424년) 5월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 훼손(毁損)되어 숙종(肅宗) 21년(1695년) 5월에 다시 세워 신도비(神道碑) 2기가 있으며 조선왕릉 중 신도비(朝鮮王陵 中 神道碑)는 헌릉 신도비(獻陵 神道碑)가 마지막이다.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 정종(正宗)의 후릉(厚陵),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세종(世宗)의 영릉(英陵)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문종(文宗)의 현릉(顯陵)부터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아니하였는데 영릉(英陵)이 예종 원년(睿宗 元年)(1460년) 경기도 여주 홍제동(京畿道 驪州 弘濟洞)으로 천릉(遷陵)하면서 신도비(神道碑)를 구 릉지(舊 陵址)에 묻음으로써 헌릉 신도비(獻陵 神道碑)가 마지막이 된 것이다. 정자각 남측 삼도(丁字閣 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헌릉(獻陵)은 태종 재세중(太宗 在世中)인 세종(世宗) 2년(1420년) 원경왕후 승하(元敬王后 昇遐)로 릉지(陵地)로 택정(擇定)되고 숭유입교(崇儒立敎)에 따라 국상(國喪)에 법석(法席)을 차리거나 재궁사찰(齋宮寺刹)을 두는 등의 불교적 제도(佛敎的 制度)를 폐지(廢止)하고 왕릉(王陵)과 비릉(妃陵)을 나란히 하여 난간석(欄干石)을 서로 연결(連結)하여 쌍릉(雙陵)으로 조영(造營)하였으며 석물(石物)은 고려조(高麗朝)의 현(玄) 정릉(正陵) 조선조(朝鮮朝)의 후릉(厚陵)과 같이 망주석(望柱石) 이외(以外)는 각 1식(式)을 더 갖추고 배설(配設)하였다.

인릉(仁陵)은 제23대 순조대왕(純祖大王)과 동비 순원왕후 김씨(同妃 純元王后 金氏)의 릉(陵)이다.

순조(純祖)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제2자(子)로서 정조(正祖) 14년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昌慶宮 集福軒)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공(蚣)이고 자(字)는 공보(公寶)이며 호(號)는 순재(純齋)이다. 정조(正祖)의 원자 문효세자(元子 文孝世子)가 정조(正祖) 10년(1786년) 요서(夭逝)함에 정조(正祖) 24년(1800년) 2월 2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사친(私親)은 가순궁 수빈 박씨(嘉順宮 綏嬪 朴氏)이다. 정조(正祖) 24년(1800년) 6월 28일 정조(正祖)가 승하(昇遐)함에 이 해 7월 4일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으나 춘추(春秋) 11세였으며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영조대왕 계비 정순왕후 김씨(英祖大王 繼妃 貞純王后 金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고 순조(純祖) 4년(1804년) 철렴(撤簾)하였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大王大妃 貞純王后 金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있으면서 천주교 대탄압(天主敎 大彈壓)이 있었으니 신유사옥(辛酉邪獄)과 을해박해(乙亥迫害)로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많이 처형(處刑)되었으며 외척(外戚)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순조대(純祖代)에 이르러 극성(極盛)하였으니 척신(戚臣)에 의한 전단(專斷)으로 과거제도문란(科擧制度紊亂),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盛行)하여 국가기강(國家紀綱)이 추락(墜落)하고 사회(社會)가 혼란(混亂)하여진데다가 잦은 수재(水災)와 전염병(傳染病)의 창궐(猖獗)로 민생(民生)이 극도(極度)로 피폐(疲弊)하였으며 민란(民亂)이 빈발(頻發)하여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나는 등 국정(國定)이 암담(暗澹)하였으나 호학(好學)의 주(主)였던 순조(純祖)는 《순재고(純齋高考)》를 친술(親述하였으며《양현전심록(養賢傳心錄)》,《동문휘고(同文彙考)》,《대학류의(大學類義)》,《서운관지(書雲觀志)》,《정조어정홍재전서(正祖御定弘齋全書)》를 간행(刊行)하였다. 순조(純祖) 34년(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慶熙宮 會祥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34년이고 춘추(春秋) 45세였다.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1834년) 11월 19일 릉호(陵號)를 인릉(仁陵)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이라 하였다가 광무(光武) 3년(1899년) 12월 19일 순조(純祖)로 고치고 제호(帝號)를 숙황제(肅皇帝)로 추상(追上)하였다. 헌종(憲宗) 원년(元年)(1835년) 4월 19일 경기도 교하군 인조(京畿道 交河郡 仁祖)의 장릉 좌측(長陵 左側) 산줄기 을좌신향(乙佐辛向)(동(東)에서 서향(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릉지부길론(陵地不吉論)으로 철종(哲宗) 7년(1856년) 10월 11일 헌릉 우강(獻陵 右岡)의 자좌오향(子佐午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 언덕에 천릉(遷陵)하였다.

순조대왕(純祖大王)의 비 순원왕후 김씨(妃 純元王后 金氏)는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으로 령돈녕부사 영안부원군 김조순(領敦寧府事 永安府院君 金祖淳)의 여(女)로 정조(正祖) 13년(1789년) 5월 15일 한성부 서부 양생방 사제(漢城府 西部 養生坊 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다. 순조(純祖) 2년(1802년) 10월 13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고 헌종 즉위년(憲宗 卽位年)(1834년) 11월 18일 왕대비(王大妃)로 봉(封)하여졌고 이튿날인 19일 헌종(憲宗)의 부(父)이며 순조(純祖)의 원자(元子)였던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문조(文祖)로 추존(追尊)됨에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진호(進號)되었다.

순원왕후(純元王后)는 헌종(憲宗), 즉위년(卽位年)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다가 헌종(憲宗)이 후사(後嗣 없이 헌종(憲宗) 15년(1849년) 6월 6일 승하(昇遐)함에 장조(莊祖)의 손(孫)이며 은언군 인(恩彦君)의 자(子)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제3자(子)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잇게 하였으니 바로 철종대왕(哲宗大王)이다. 철종대왕(哲宗大王)이 즉위(卽位)함에 다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철종(哲宗) 2년(1851년) 12월 28일 철렴(撤簾)하였다. 철종(哲宗) 8년(1857년) 8월 4일 창덕궁 양심각(昌德宮 養心閣)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69세였다. 이 해 8월 10일 시호(諡號)를 순원(純元)이라 하고 릉호(陵號)를 문릉(文陵)으로 정하였다가 인릉(仁陵)에 합장(合葬)하기로 함에 따라 새 릉호(陵號)는 쓰지 아니하였다. 이 해 12월 17일 순조 인릉(純祖 仁陵)에 합장(合葬)하였으며 광무(光武) 3년(1899년) 12월 19일 시호(諡號)를 숙황후(肅皇后)로 추상(追上)하였다.

인릉(仁陵)은 동원합봉(同原合封)으로서 릉침(陵寢)에 병풍석(屛風石)을 설치(設置)하지 아니하였고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릉침 주위(陵寢 周圍)로 양석(羊石)과 마석(馬石) 각 2쌍을 교호 배치(交互 配置)하였고 릉전(陵前)에는 상석(床石) 1좌와 그 좌우 양측(左右 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으며 그 밖으로 3면(面)의 곡장(曲墻)을 세웠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 1쌍을 상면 배치(相面 配置)하고 중앙(中央)에 명등석(明燈石) 1좌를, 그 아래에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을 배치(配置)하였으며 상설(象設)은 단릉(單陵)의 형식(形式)이다. 문(文) 무인석(武人石)의 조각(彫刻)은 사실주의적 기법(寫實主義的 技法)으로 새겨져 섬세(纖細)하고 아름답다. 릉침(陵寢)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비각(碑閣)은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있고 비석(碑石) 2기(基)가 있다. 구비(舊碑)는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순조대왕인릉 순원왕후부좌(朝鮮國純祖大王仁陵 純元王后 左)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철종(哲宗) 8년(1857년)에 세운 것이고 신비(新碑)는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대한순조숙황제인릉 순원숙왕후부좌(大韓純祖肅皇帝仁陵 純元肅王后 左)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광무(光武) 4년(1900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남면(丁字閣 南側)에 삼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홍살문 남측 도로변(紅箭門 南側 道路邊)에 재실(齋室)이 있다. 재실(齋室)은 릉역(陵域)과 같은 국내(局內)에 있는 것인데 헌릉(獻陵) 인릉 재실(仁陵 齋室)은 릉역(陵域)과 상격(相隔)하여 있는 바 이 재실(齋室)도 당초(當初)에는 릉역(陵域)과 한 국내(局內)에 있었으나 그 중간부분(中間部分)이 6 25 이후(以後) 인근주민(隣近住民)들에 의하여 농지(農地)로 개간(開墾)된 후 농지개혁법(農地改革法)에 의하여 경작자(耕作者)에게 분배처분(分配處分)됨으로써 상격(相隔)하게 된 것이다.




헌릉 태종 제향 : 제관과 참반원 행렬(재실->왕릉)

헌릉 태종 제향 : 집사의 국궁사배

헌릉 태종 제향

인릉 전경

인릉 석물

인릉 석물

인릉 제향

인릉 제향_취위 : 제를 모시기 위해 자리에 섬

헌릉 제향

인릉 제향_기신제 취위 : 제를 모시기 위해 자리에 섬

헌릉 제향

헌릉 제향

헌릉 제향

헌릉 제향

인릉 비각 정면(보수전)

인릉 비각 배면(보수전)

인릉 비각 우측면(보수전)

인릉 비각 좌측면(보수전)

인릉 정자각 배면(보수전)

인릉 정자각 우측면(보수전)

인릉 정자각 우측면(보수전)

인릉 정자각 정면(보수전)

헌릉 비각 배변

헌릉 비각 우측면

헌릉 비각 정면

헌릉 비각 좌측면

헌릉 전경

헌릉 정자각 배면

헌릉 정자각 우측면

헌릉 정자각 정면

헌릉 정자각 좌측면

재실 담장

재실 담장 상세

재식 본채 우측면

재실 본채 배면

재실 본채 정면

재실 본채 좌측면

재실 행랑채

곡장

봉분

헌릉 전경

헌릉

헌릉전경

인릉근경

인릉전경

헌릉전경

석인,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