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4대 민애왕(838∼839)의 무덤으로 높이 3.8m, 지름 12.5m이다.
여러차례 도굴을 당하였으나 1984년 9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무덤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규모를 밝히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조사결과에 의하면 무덤 밑부분 바깥쪽으로 일정한 간격의 12개의 구멍이 있었다. 구멍에는 곱돌로 만든 12마리 동물의 얼굴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하나씩 묻었다. 조사 당시에는 쥐·소·닭·돼지 4개만 발견되었다. 나머지는 무덤의 외부받침석이 만들어질 때 파손되고,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무덤 주변에서 뼈단지가 발견되었는데,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란 글자가 있어 헌덕왕 7년(815)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뼈단지는 무덤이 만들어진 후에 묻힌 것으로 무덤은 815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839년에 죽은 민애왕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전문설명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능<陵> 남쪽 가까이에 희강왕릉<僖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2.5m, 높이 3.8m이다. 이 왕릉<王陵>은 광복 이전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였고, 1981년에도 도굴 미수사건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봉분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가공석<加工石>으로 호석<護石>을 축조하였는데,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3단<段>으로 쌓아올린 다음 갑석<甲石>을 덮었다. 이 호석<護石>에는 또 두께 35㎝, 길이 100-130㎝의 단면 5각형으로 가공한 지주석<支株石> 20개를 봉분의 둘레를 따라 190∼290㎝ 간격으로 받쳤는데, 조사 결과 이는 후에 보축<補築>한 것이었다. 능<陵> 전방에는 장방형 판석<長方形 板石> 2매로 조립한 작은 상석<床石>이 놓여 있다.
봉분 주변에 대한 조사결과 봉분 밑둘레 외곽으로 깊이 13㎝, 지름 25㎝ 크기의 구멍 12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파고 납석제<蠟石製>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하나씩 묻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높이 10㎝ 내외의 작은 것으로 무덤의 바깥쪽을 향하게 놓여졌다. 조사 당시에는 쥐·소·닭·돼지상 등 4가지 상만 발견되었는데, 나머지는 호석<護石> 받침석이 세워질 때 파손되고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능<陵> 주변에서 능<陵>이 축조된 뒤에 매장된 골호<骨壺>가 발견되었는데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중국 당<中國 唐>나라 때의 년호<年號>로서 서기 815년에 해당한다.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재위<在位> 838-839)은 본명이 김명<金明>이고,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이홍<利弘>과 더불어 희강왕<僖康王>을 협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역시 곧 피살되었다. 재위기간은 왕위쟁탈전의 혼란한 시기였으며,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피살사건과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전할뿐 장지<葬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한 원화 십년명 골호<元和 十年銘 骨壺>가 이 능<陵>이 조성된 뒤에 묻혀, 이 능<陵>은 서기 815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민애왕<閔哀王>의 연대와는 맞지 않는다.
경주 전 민애왕릉 전경 경주 전 민애왕릉 전경 경주 전 민애왕릉 난간석 봉분 경주 전 민애왕릉 난간석 경주 전 민애왕릉 전경 경주 전 민애왕릉 측면 경주 전 민애왕릉 능 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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