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이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높이 4.2m, 지름 15.3m의 둥근형태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밑둘레에 돌을 4단으로 쌓았다. 일찌기 도굴되었으며 비에 의한 피해로 긴급조사를 하였다. 관이 놓여 있는 방은 네모 형태로 천장은 둥글게 모아져 있는 활천장(궁륭상천장)이고, 이 방과 연결된 통로인 널길(연도)은 동쪽에 있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이다. 여기서 꽃무늬 토기도 나왔다.
무덤 보호를 위해 다듬은 돌을 4단으로 쌓은 형태는 신라 왕릉에서는 특이한 형식으로 정강왕(886∼887)릉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내부구조나 출토된 토기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헌강왕의 재위기간이었던 9세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전문설명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남쪽에 정강왕릉(定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4단(段)으로 쌓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은 지대석(址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으나 갑석(甲石)은 덮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의 구조는 이 능(陵) 남쪽에 있는 정강왕릉(定康王陵)과 같은 형식이다. 능(陵)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짠 석상(石床)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놓이지 않았다.
이 능(陵)은 일찍이 도굴(盜掘)의 피해를 입어 1993년 우기(雨期)에 석실 개석(石室 蓋石)과 벽 일부가 내려앉아 내부의 긴급 수습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조사 결과 석실(石室)은 평면 방형(方形)에 궁륭상천정(穹륭狀天井)이었으며, 남쪽으로 난 연도(선도)는 석실 동쪽으로 편재(편재)되어 있었다. 석실(석실) 서벽(서벽)에 붙여 1대의 1인용 시상(시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석제 두침(石製 頭枕)과 족좌(足座)가 출토되었다. 부장품(副葬品)은 모두 도굴되었으나 인화문토기편(印花紋土器片)이 약간 수습되었다. 그런데 석실(石室)의 구조나 토기(土器)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形式)이어서 헌강왕(憲康王)의 재위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在位)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장자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이 왕(王) 때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왕(日本王)이 사신을 보내 황금(黃金)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886년 7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경주 헌강왕릉 경주 헌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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