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89호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오늘의 쉼터 2008. 2. 18. 22:45


종     목 사적  제189호
명     칭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忠州 林忠愍公 忠烈祠)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면적 29,942㎡
지 정 일 1969.11.2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단월동 385-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충렬사
관 리 자충주시

일반설명

충민공 임경업(1594∼1646)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숙종 23년(1679)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에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영조 3년(1727)에는 사당 이름을 충렬사라 했다.

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 충주에서 태어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등 나라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명나라를 숭상하던 장군은 인조 30년(1642)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위협을 받게되자 명군과 협력해 청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나라는 장군에게 여러 제의를 하면서 포섭하려 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후 1646년 국내의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관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피살되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했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가 있다.


전문설명


이곳은 조선(朝鮮) 인조(仁祖)때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1954∼1646)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선조(宣祖) 27년(1594) 이곳 충주 대림산 기슭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출중하였다.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무과에 급제한 후 낙안군수(樂安郡守), 정주목사(定州牧使),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 겸(兼) 영변부사(寧邊府使), 의주부윤(義州府尹), 평안도(平安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兼) 안주목사(安州牧使) 등 요직을 두루 맡아 선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국토방위를 위하여 대외항전의 일선의 많은 공헌을 남겼다. 인조 2년(1624)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크게 동요되었을 때에 장군은 반란군을 진압하여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서훈(서勳)되었다. 정묘(丁卯),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란을 당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장군은 백마산성(白馬山城), 의주성(義州城) 등을 수축하여 국방강화에 전력하는 한편, 반청친명(反淸親明)의 확고한 신념으로 청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으니, 실로 장군은 나라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군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심기원(沈器遠)의 모반(1644)에 연루되어 억울한 일생을 마쳤다. 그후 숙종(肅宗) 23년(1679)에는 이곳에 사당을 세웠고, 동왕(同王) 32년(1706) 나라에서는 장군에게 충민(忠愍)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영조(英祖) 3년(1727)에는 이곳에 충렬사(忠烈祠)라 사액(賜額)하였다.




임충민공 충렬사

임충민공 충렬사

임충민공충렬사전경

임충민공충렬사전경

충렬사

영정

임충민공충렬사

임충민공충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