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 사신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곳이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여기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왜군과의 벽제관 싸움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의 자리는 인조 3년(1625)에 고양군을 옮길 때 세운 객관으로, 그 후의 보수흔적은 확실하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불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은 관서지방으로 가는 큰 길에 설치된 첫 역관이었으며, 또한 국왕이 중국 사신을 친히 배웅하고 맞이하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곳이다.
전문설명
이 자리는 옛 역관(驛館)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 또는 의주로(義州路)·연행로(燕行路)에는 이와 같은 역관이 10여처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이 숙박 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국왕이 제릉(齊陵) 친제시(親祭時)에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편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도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 숙박시설이라 하겠다. 더욱이 이들 역관은 역을 동반하고 있어서 교통·통신의 변의를 최대한도로 이용할 수 있기도 했다. 더욱이 벽제관은 한양에 인접하고 있기 ??문에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은 입경전 1일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입경하는 것이 정예로 되어 있었다.
본래 고양군의 고읍치(古邑治)는 벽제관에서 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는 읍치를 옮긴 1625(인조3년)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客館)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중건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일부가 헐렸고 6·25동란에 전소되었다. 그러나 1960년경까지도 객관문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하여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관사(館舍)의 윤곽과 터전만이 남아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북방으로 혜음령(惠陰嶺)과 동북방으로 있는 퇴패치((退敗峙) : 됫박고개), 그리고 서남으로 퍼져가는 도로를 이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군과 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른바 벽제관싸움의 전장터 중심지가 되는 자리이기도 하며 이여송군이 혜음령에서 대패한 많은 뒷얘기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벽제관은 관서로 연로에 설치한 첫 역관이었다는 점 외에 국왕이 중국사신을 친히 영송하던 모화관(慕華館)에 버금하는 의미를 갖는, 반드시 1일전에 이곳에 유숙하고 입경하도록 된 객사(客舍) 자리라 할 수 있다.
벽제관지 장대석 벽제관지 벽제관지건물지유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