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46호 무주 적상산성

오늘의 쉼터 2008. 2. 18. 18:54


종    목 사적  제146호
명     칭무주 적상산성 (茂朱 赤裳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214,976㎡
지 정 일 1965.07.10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국유,사유
관 리 자무주군

일반설명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방어산성이다.

고려 후기 거란이 침입한 후 최영은 이곳에 산성을 쌓게 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도 반드시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다. 고려 때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이미 산성을 이용하여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이 피난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광해군 2년(1610) 이곳에 조선시대 5개의 역사책보관소 중의 하나인 적상산사고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였다. 실록전, 사각(史閣), 선원각, 군기고, 대별관, 호국사를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고 운영했다.

현재 성벽은 무너져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각과 기타의 건물들도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최근에 성 안에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전문설명


상성산(裳城山) 혹은 상산(裳山)이라 불리는 천험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입보농성(立保籠城)을 위한 산성으로, 해발 1000m이상의 산봉과 능선을 따라 산위의 계곡을 두르고 있다. 절벽이 여인의 치마와 같이 가파른데서 산의 이름이 생겼다 한다. 현재 북문지·서문지 및 사고지(史庫址)가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산성은 석축으로 둘레 1만 6,920척 높이 7척이었으나 폐성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성내에는 비옥한 토지가 있었고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나 있었다. 고려 때에 거란의 침입과 왜구의 침입 때에 이미 산성이 경영되어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이 피난한 바 있었고, 조선 초기에는 최윤덕(崔閏德)이 직접 답사한 바 있다. 1612년에 실록전(實錄殿)이, 1614년에 사각(史閣)이, 1641년에 선원각(璿源閣)·군기고(軍器庫)·대별관(大別館), 1643년 호국사(護國寺) 등이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이후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고, 경영하였다.

성벽은 무너져서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각과 기타의 건물들도 그 터만이 남아 있고 안국사(安國寺)가 있을 뿐이다. 불과 90여년 전만 하더라도 사각 등의 수리를 위하여 고종이 수리비를 지급하였다는 사실이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성이 있는 상산(裳山)은 상성산(裳城山)이라고도 하는데 호남에서 영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요로이기도 하였으며, 산 가운데에는 넓은 분지가 있다.

고려말에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인근 수십여 곳의 군현이 도륙되었는데도 여기에 사는 주민들만은 그 참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최영(崔瑩)은 이곳에 산성을 축조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을 살펴본 뒤 반드시 축성하여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말(高麗末)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벽

산성내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