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32호 강화산성

오늘의 쉼터 2008. 2. 18. 07:12


  
종     목 사적  제132호
명     칭강화산성(江華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784,170㎡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국유,공유,사유
관 리 자강화군

일반설명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전문설명


권신(權臣) 최이(崔怡)는 강화천도(江華遷道)에 앞서서 1232년(年) 영군(領軍)을 동원(動員) 하여 강화(江華)에 궁궐(宮闕)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築造)하였다. 그리하여 고려(高麗)는 몽고(蒙古)의 제2차 침입(侵入)이 있는 1232년 6월 16일 대몽항전(對蒙抗戰)의 기치를 들고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하였다. 그러나 왕궁(王宮)과 도성(都城) 및 관아의 시설이 완비(完備)된 것은 아니었다. 제도(諸道)의 장정(壯丁)을 징발하여 강화성(江華城)과 궁궐 및 백사공해(百司公해)를 본격적으로 영조(營造)하기 시작한 것은 1234년 1월부터이다. 이때 송도(松都)의 궁궐과 비슷하게 하여 산(山)의 이름까지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성(城)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周圍) 3874척(尺)으로 지금의 강화성이며 중성은 1250년에 축성(築城)하였는데 주위(周圍)가 2960여간(餘間)으로 지금 선원면(仙源面)의 토성지(土城址)가 그곳인듯 하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築造)하기 시작하였는데 강화동쪽 해협(海峽)을 따라 길이가 37070척(尺)이였다 한다. 이들 성(城)은 모두 토성(土城)으로 축조되었다. 1270년(고려원종(高麗元宗) 11년) 5월 23일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하면서 몽고(蒙古)의 요청(要請)으로 강화(江華)의 성(城)을 헐었던 것이다. 조선초기(朝鮮初期)에 다시 축성(築城)하면서 고려(高麗)의 내성(內城)이던 강화성(江華城)울 축소시켰다. 1637년 병자호란(病子胡亂)때 청군(靑軍)에 의하여 다시 파괴당하고 1677년 숙종조(肅宗朝)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공사(改築工事)를 하면서 성(城)의 규모(規模)를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내성규모(內城規模)로 넓혀서 전면석성(全面石城)으로 축성(築城)하였다. 그후 1709년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다시 개축(改築)하였고 조선말기(朝鮮末期)에 보수(補修)가 계속되었다. 성문(城門)은 동서남북(東西南北)에 4개소가 있고 암문(暗門)이 4개소 수문(水門)이 2개소가 있었다. 성문(城門)의 문루(門樓)는 남문에 안파루(晏波樓), 서에 첨화루(瞻華樓), 북에 진송루(鎭松樓), 동에 망한루(望漢樓)가 있었다.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건립(建立)하였고 안파루는 퇴락되어 쓸어지자 1973년에 다시 복원(復元)한 것이다. 북문의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門樓)가 없었던 것을 1783년 성(城)을 개축(改築)하면서 건립(建立)되었다. 수문(水門)은 서문과 동문옆에 있었는데 서문옆의 것은 1900년경(年頃)에 갑곶진(甲串鎭) 옆으로 옮겨져 있다.동문쪽은 강화 시가지(市街地가 되어 성과 문루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現在) 성은 강화읍(江華邑)의 남북 산자락으로 완전히 남아있고 동쪽이 없어졌다. 체성(體城)은 석축(石築)으로 견고하게 쌓고 그위에 여장을 설치(設置)하였던 것인데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조선말(朝鮮末)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와 일본침략(日本侵略)에 의한 강화조약(江華條約)을 체결한 수많은 외침(外侵)의 역사 현장이다.




강화산성

강화산성

강화산성

강화산성 서문

강화산성

성벽

서문

강화산성

남문

남문성벽

강도남문

강도남문 원경

강도남문 측면

강도남문 편액

강도남문과 성벽

강부동문 전경

강부동문

강화산성 전경

남문 안파루

남문 안파루 전경

남문 안파루 편액

남문 홍예문

동문 망한루 편액

동문 망한루 홍예문

동문 망한루

동문 성곽 성상로

동문 성곽 외부

동문 성벽

북문 내측 성벽1

북문 내측 성벽2

북문 성벽 성상로

북문 진송루 내부

북문 진송루 성곽 전경

북문 진송루 외측 전경

북문 진송루 전경

북문 진송루 편액

북문 진송루 홍예문

북문 진송루

서문 성벽

서문 원경

서문 첨화루

서문 홍예문

서문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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