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23호 창경궁

오늘의 쉼터 2008. 2. 17. 23:42


종     목 사적  제123호
명     칭창경궁(昌慶宮)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218,148㎡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일반설명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들의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전문설명


창경궁< 昌慶宮 >은 태종< 太宗 >이 거처< 居處 >하던 수강궁< 壽康宮 > 터< 址 >에다 건립< 建立 >한 정궁< 正宮 >이 아닌 이궁< 離宮 >이다. 수강궁은 세종< 世宗 >에게 양위< 讓位 >한 태종< 太宗 >을 위해 세종이 지은 것이다. 창경궁< 昌慶宮 >은 성종< 成宗 >이 세조< 世祖 >의 비< 妃 > 정희왕후< 貞熹王后 >와 생모< 生母 >인 소혜왕후< 昭惠王后 > 및 예종< 睿宗 >의 비< 妃 > 안순왕후< 安順王后 >를 위하여 성종 14년 (1483)에 건립되었다. 그 다음해에 정전< 正殿 >은 명정전< 明政殿 >, 편전< 便殿 >은 문정전 < 文政殿 >, 내전< 內殿 >은 통명전 < 通明殿 > 환경전 < 歡慶殿 > 경춘전 < 景春殿 >·수녕전< 壽寧殿 >으로 이름 붙였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 때 불탄 것을 광해군< 光海君 > 8년(1616)에 복구< 復舊 >하였고 순조< 純祖 > 30년(1830)에 큰 화재< 火災 >로 내전< 內殿 >이 불탄 것을 1834년에 다시 지었다.순종< 純宗 > 융희< 隆熙 > 3년(1909)에는 일제< 日帝 >의 침략< 侵略 > 세력< 勢力 >에 의하여 궁을 헐고 동물원< 動物園 >과 식물원< 植物園 >을 만들고 1911년에는 박물관< 博物館 >을 설치< 設置 >하고 동·식물원< 動植物園 >을 포함< 包含 >하여 창경원< 昌慶苑 >이라 이름을 고쳐 궁< 宮 >의 격< 格 >을 떨어뜨렸다. 1983년 8월 창경원을 재건< 再建 >하면서 옛이름을 다시 찾아 창경궁이라 하였다. 지금 창경궁 내에는 조선왕궁< 朝鮮王宮 > 정전< 正殿 > 중에 가장 오랜 건물인 명정전< 明政殿 >(국보 제226호)과 아름다운 연못을 갖춘 내전< 內殿 >인 통명전< 通明殿 >(보물 제818호)이 있다.




창경궁전경

경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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