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전문설명
사직단은 조선< 朝鮮 > 태조< 太祖 >가 한양< 漢陽 >에 서울을 정하고 궁궐< 宮闕 >, 종묘< 宗廟 >를 지을 때 함께 만든 것이다. 태조 3년(1394)에 고려< 高麗 >의 예< 例 >를 따라 토신< 土神 >을 제사하는 국사단< 國社壇 >은 동쪽에, 곡신< 穀神 >을 제사하는 국직단< 國稷壇 >은 서쪽에 배치하고 신좌< 神座 >를 각각 북쪽에 모시었다. 1897년 고종< 高宗 >이 황제위< 皇帝位 >에 오르자 이곳을 태사< 太社 >·태직< 太稷 >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는데, 이 사직< 社稷 >을 종묘와 함께 중하게 여겨 중춘< 仲春 >과 중추< 仲秋 >와 납일< 臘日 >(동지< 冬至 > 후 세번째 되는 개날< 戌日 >)을 택하여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 전경 사직단 제사 사직단 제사 남신문 남신문에서 바라 본 사직단 북신문 북측 전경 사직단 북측 원 사직단 원경 서신문 서신문에서 바라본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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