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오늘의 쉼터 2008. 2. 17. 20:33


종     목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명     칭각자장 (刻字匠)
분     류 무형문화재 / 전통기술 / 미술
수량/면적

개인

지 정 일

1996.11.01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시     대

기타

소 유 자

오옥진

관 리 자오옥진

일반설명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목각판을 각자 또는 서각이라 하는데, 인쇄를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목판본이라 한다. 글자를 반대로 새겨 인쇄방식에 따라 인쇄하는 과정도 각자라 하며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각자장 또는 각수라 한다.

각자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목각판인『팔만대장경』이 만들어 지는 등 사찰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기술이 전해져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한 많은 목판 인쇄물이 간행되었다. 각자장의 기량은 각질의 흔적, 글자체의 균형도, 잘못된 글자나 글자획이 빠진 것 등으로 가늠한다. 잘못 새긴 것이 생긴 경우에는 잘못된 글자 부분만 파내어 다른 나무를 박고 다시 새긴다.

한편 각종 궁궐의 건물이나 사찰·사가의 건축물에도 나무에 글자를 새려 현판(顯板)을 거는 일이 일반화 되어 대부분의 건축물에는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 여기에 각을 하는 작업 역시 각자장의 일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각자의 정교함이 매우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목판 인쇄술을 대신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목판 인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이후 일제강점기 사진술과 새로운 인쇄술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목판 인쇄는 급속히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근래에 이르러서는 서양인쇄술의 도입으로 급속히 쇠퇴하여 건물의 현판이나 유명 서예가의 글씨를 새긴 판각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전문설명

 

각자란 글을 새긴다. 즉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목각판(木刻板)을 각자 또는 서각(書刻)이라 하는데 인출(印出)을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목판본(木版本)이라 하여 글자를 반대로 새겨 인출(인쇄)방식에 따라 인쇄하는 과정도 각자라 하며 각자를 하는 장인(匠人)을 각자장 또는 각수(刻手)라 한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각자문화가 발달하였다. 동양에서 각자문화의 선구는 중국으로서 은대(殷代)의 갑골문(甲骨文), 주대(周代)의 각종 금문(金文), 진대(秦代)이후의 석각(石刻), 당대(唐代)이후부터는 종이의 사용이 일반화 되었으나 「문자의 새김」즉 각자는 모필로 쓰는 것 보다 먼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각자문화의 역사는 중국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서기 414년), 중원 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5C후반), 고구려 평양성 석각(石刻)(5C), 진흥왕 순수비, 단양(丹陽)적성비(赤城碑), 신라 남산 신성비(新城碑), 울진 봉평비(鳳坪碑), 백제 무령왕릉 매지권(서기 525년) 등의 석각류(石刻類)를 비롯하여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명문(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銘文)(서기 415년),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광배문(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光背文)(서기 6C),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출토 금판경첩(金板經帖)(고려초기) 등의 금문(金文)과 약간의 삼국시대 인장류(印章類) 등이 고대 각자문화의 찬란한 유존물로서 이들 대부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상태이다.

각자는 위와 같은 종류 이외에도 거울에 새긴 문자, 화폐에 새긴 문자, 도자기에 새기거나 찍은 문자, 옥기, 석경(石經), 봉니문자(文字), 벽돌 기와에 남긴 문자 등 그 종류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각자들은 탁본(擢本)이나 인쇄를 하기 위한 새김이 아니지만 분명히 후대의 조판(雕版)인쇄의 각자 방법과 기술상 연결되는 것은 확실하며 그 선구라 할 수 있다. 조판인쇄에 필수재료인 종이와 먹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문헌상 종이의 기원은 후한 화제(和帝) 1년(서기 105년) 환관인 채륜(蔡倫)이 나무껍질, 삼, 누더기, 어망 등을 풀어 그 섬유로 종이를 처음 만들어 황제에게 바치자 이를 매우 기뻐하여 그 후부터 채륜이 만든 종이를 썼다고 후한서에 나온다. 문헌에는 이것이 종이의 기원이나 그 이전부터 종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기록이나 출토물은 적지않아 이를테면 그 보다 빠른 전한서의 조비연전(趙飛燕傳)에 엷은 노랑색 종이로 해석되는 대목이 나오고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종이는 협서성 근교의 고본에서 1957년 출토된 10cm평방의 것으로 기원전 140년에서 87년 사이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언제 종이가 전래되었는가는 문헌상 확인할 수 없으나 백제의 학자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 등 전적을 전한 것이 4세기요, 610년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일본에 전수시킨 것으로 미루어 그 훨씬 이전에 전래되었을 것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조선종이는 조판(雕版)인쇄와 글을 쓰는 문필용으로서 뿐만 아니라 용도가 다양하다. 중국에서 조선종이를 속칭 등피지(等皮紙)라고도 했는데 가죽만큼 질기다고 해서 얻은 이름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닥종이(지)는 두텁고 질겨서 오래 견딜수 있는 장점이 있다. 중국에서는 계림지(鷄林紙), 백수지(白睡紙)라고 부를만큼 희고 질기며 윤기가 나서 수출까지 하였다. 이러한 종이의 발달은 한국의 인쇄문화를 일찍이 싹트게 하여 발전시킨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인쇄재료에서 또 하나 필수적인 것은 먹이다. 먹은 한대(漢代)의 대서법가(大書法家) 위탄(韋誕)이 발명했다고 한다. 위탄 이전에 묵서(墨書)의 출토물이 있어 고고학적으로 먹의 사용은 매우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먹의 역사를 칠(漆), 석묵(石墨), 연묵(烟墨)의 순서대로 변천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만주 집안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부근의 고구려 고분 중에서 발견된 현실벽(玄室壁)의 묵서(墨書), 모두루묘지(牟頭婁墓地)가 먹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현존물이다. 또 다른 실증자료는 1988년 경남 의창군 다호리 원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붓 다섯자루이다. 붓은 B.C 2C경 이므로 먹은 이미 조기에 한반도에서 사용되었음을 알수있다.

우리나라는 종이와 함께 질 좋은 먹이 생산되었으며 중국에 먹이 공납(貢納)되어 유명하다. 육우의 묵사《墨史》고려조(高麗條)에 그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왕사정(王士禎)의 지북우담《池北偶談》외국 묵조에도 기록이 있다.종이와 먹은 조판인쇄의 필수재료일 뿐 아니라 문자기록에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재료이다.

조판인쇄는 수대(隋代)에 시작하여 당대(唐代)를 거쳐 오대(五代)에는 널리 퍼졌고 조판인쇄물은 중국에서 발생하여 송대(宋代)에는 매우 정밀하였다.우리나라에 전해지기는 신라시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신라시대에 간행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서기 751년)이다. 이 경은 닥종이 12장을 이어 붙인 두루마리로서 각 행의 글자 수를 7∼9자(字)로 새긴 총 길이 620cm 소형목판 권자본(圈子本)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그 동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졌던 백만탑다라니경(白萬塔陀羅尼經)(서기 770년)이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양에서의 초기 인쇄각자(印刷刻字)는 불서(佛書)에서 비롯되어 차츰 관과 민가로 확산되었다고 보여진다. 우리나라는 9세기 후반기인 신라 말기에 목판인쇄물은 널리 보급되어 마침내 시문(詩文)등 일용의 학술서까지 간행되었다고 추정할수 있다. 우리나라의 판본에는 사찰판과 관청에서 내던 관판, 명문사가에서 낸 사가판(私家版), 서원(書院)에서 낸 서원판, 국왕 및 왕실의 판본, 민간이 시장에서 팔기위한 방각본(坊刻本)등이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판본(목각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목판인쇄술을 계승하여 사찰을 중심으로 경전이나 고승의 시, 문집 및 저술 간행이 성행되면서 목판인쇄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새김의 정치함은 놀라울 정도이며 각법 또한 탁월하여 고려시대 불교경판들이 가장 뛰어난 조판(雕版)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에 의하여 사찰경제가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고려시대의 목판인쇄가 그대로 전래되어 판각이 이루어 졌다. 불교경전 간행을 위한 간경도감(刊經都監) 이외에도 「훈민정음」 판본을 비롯하여 「삼국사기」,「삼국유사」등이 간행되었다.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사찰은 경판만 간행한 것이 아니라 천자문, 명심보감, 개인의 시문집, 유교경전 등도 간행하여 사찰은 일종의 목판전문 출판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목판은 활자본과는 달리 한 번 새겨 놓으면 간행량에 제한을 받지 않고 찍어 낼 수 있을뿐 아니라 목판을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수 있는 장점때문에 조선조 후기까지 성행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내려 오면서 점차 각자의 새김은 초기에 비해 그 정교함이 매우 떨어져 퇴화현상을 나타내었다. 뿐만 아니라 금속활자의 발달은 목판각자의 퇴화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각자장-오옥진

옛글자를연구하는보유자

글자를새기는모습

각자로찍어서완성된서책

각자하는 모습

각자하는 모습

완성된 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