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4㎞의 성이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 있는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의 하나이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하여 금강변까지 흙으로 쌓아만든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을 비롯하여 관청·민가·절·상가 및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또 물길도 파놓아서 자연적인 2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여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보호를 위한 외곽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전문설명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일원에 있는 백제(百濟) 시대의 왕성 주변의 시가지를 에워싼 토축의 외성이다.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비)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의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의 하나이다.
성에는 사방에 문지가 있다. 이 나성은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 시설이며 축성연대는 성왕대(523∼554)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성벽은 부소산성(扶蘇山城)의 동문터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를 거쳐 금강 변까지 토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현재는 청산성 동쪽으로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그리고 필서봉부터 염창리까지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동쪽으로 논산으로 왕래하는 동문지와 공주로 통하는 동북 문지가 있다.
동문지 부근의 나성 단면을 조사한 결과 저변 13m, 상변 4m, 높이 5.2m이며 황토질흙으로 토축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 약 300m지점에 1978년 상수도 사업으로 나성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저변 13m, 상변 2m, 높이 5.2m의 토축이었으며 진흙으로 다져서 만든 판축(版築)의 흔적이 있었다. 표고 121m의 가장 높은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 나성의 끝부분은 적심석(積心石)을 놓고 축조한 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서쪽 나성은 부소산성 서문 바깥 지점을 기점으로 하여 현재 유스호스텔을 거쳐 관북리·구교리·유수지(遊水池)·동남리·군수리·성말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 나성문지는 구아리로 통하는 서북문지와 장성백이 남쪽에서 규암으로 통하는 서문지가 있다. 남쪽 나성은 동리·중리·당리의 뒷산에 연결하여 축조하였으며, 주초석과 문초석이 남아 있다.
나성 안에는 백제 시대 왕궁을 비롯, 관아·민가·사찰·상가· 및 수도 수비를 위한 방위 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부·중부·전부·하부·후부의 오부제도(五部制度)를 두고 다스렸다.
전체적인 구조상 남쪽과 서쪽은 금강이 흐르고 있고 또 수로도 파 놓아서 이 나성은 자연적인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주서(周書)에 의하면 도성 안에는 민가가 있었으며 방(方)마다 500인씩 총 2,500인의 군대로 방위에 임하였다 한다. 나성이 완성되고 오부제가 완성된 시기는 7세기 초인 무왕 때로 추정되고 있다.
이 나성은 청수산·청마산성과 함께 왕도의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 시설로 중요한 성(城)이었다.
부여나성 부여나성 부여나성 부여나성 부여나성 부여나성 부여나성 금강변쪽 옛 나성일대 복원공사중인 부여 나성 복원공사중인 부여 나성 복원공사중인 부여 나성 복원된 부여 나성 복원된 부여 나성 복원된 부여 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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