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전문설명
한강 북안에 독립된 산괴로 솟은 해발 124.8m의 덕양산(德陽山) 산봉과 그 지맥을 따라 계곡을 두른 토축산성으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성이 존재하였다고 믿어지고 있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 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포용하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창릉천(昌陵川)이 유적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어 자연적인 해자를 이룬 것은 삼국시대의 산성 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은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특히 나당 전쟁(羅唐戰爭)때까지 남북 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일 뿐이며, 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내서의 경우 정상부를 깍아 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 능선을 이용하여 성의 내부 쪽에 간단한 석축 기초를 두고 기초 부분의 너비가 약 6.6m ∼ 8m이고 5∼10cm의 두께로 점토와 마사토를 교대로 판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의 흔적이 희미하게 계곡을 이룬 산 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산성은 삼국시대 이래의 사용과 수개축의 결과인 듯하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기의 유물들이 많이 보이고, 어골문(魚骨文)의 기와편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 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산성은 1593년(선조(宣祖) 26) 권율(權慄)의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남아 있다.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벌여 권율을 모신 충장사(忠莊祠)를 세우고, 임진왜란 관련의 유물 전시관이 건립되어 있다.
행주산성 행주산성 행주산성 행주산성 행주산성 행주산성충장사 대첩비(1603년세움) 대첩비각 행주대첩도 권율장군영정 행주대첩비(1963년건립) 진강정 국궁장 권율 도원수 동상 대첩기념관 대첩비각 덕양정1 덕양정2 무궁화와 행주대첩비 진강정 충의정1 충의정2 충장사 내부 충장사 토성 행주대첩부조 행주대첩비 행주대첩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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