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 때의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선덕여왕 때는 비담(毗曇)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평정하기도 했으며,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큰 몫을 한 곳이다.
※(명활산성 → 경주 명활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이 산성은 경주시< 慶州市 >의 동쪽에 해당되는 이곳 명활산< 明活山 >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둘레를 따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신라시대< 新羅時代 >의 석축성< 石築城 >으로 전체 길이는 약 6km에 이른다. 성을 쌓은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 실성왕< 實聖王 > 4년(405)에 명활성을 공격해온 왜병을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축성< 築城 >에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한 점 등을 미루어 서기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남은 것은 진평왕< 眞平王 > 때에 개축< 改築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선덕여왕< 善德女王 > 몰년< 沒年 >(647)에 비담< 毗曇 > 등이 왕위< 王位 >를 노려 이곳을 근거로 반란< 叛亂 >을 일으켰으나 김유신< 金庾信 > 장군이 평정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산성은 경주의 서쪽에 있는 선도산성< 仙桃山城 >, 남쪽의 남산성< 南山城 >과 함께 신라의 도성< 都城 >을 지키기 위해 동쪽에 마련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경주 명활성 경주 명활성 B지역외벽및보축벽원경 경주 명활성 남쪽성벽 전경 경주 명활성 전경 경주 명활성 전경 근경 경주 명활성 측면 발굴 중 명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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