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원원사는 밀교의 후계자들인 안혜·낭융 들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들이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절터에는 금당이 있던 자리와 2기의 3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가 남아 있다. 탑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규모와 형태가 거의 같으며, 일제시대에 복원된 것이다. 탑에는 12지신상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는데, 그 수준이 매우 높아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우수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두 석탑 사이에는 석등이 있고 4기의 부도가 동쪽과 서쪽 계곡에 나누어져 있으며, 모두 고려시대 이후 것으로 보인다.
원원사는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고, 조선 후기까지 명맥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탑의 조각수준으로 보아 당시 품격있는 절이었음을 알게 한다.
전문설명 봉서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신라 선인종의 개조인 명랑법사<明郞法師>가 세운 사천왕사, 금광사와 함께 밀교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었다. 이 절은 밀교를 계승한 안혜<安惠>·낭융<朗融>·광덕<廣德>·대연<大緣> 등 4인의 대덕<大德>이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고자 김유신<金庾信>·김의원<金義元>·김술종<金述宗> 등과 뜻을 모아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0여리 되는 이곳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4인 대덕의 유골을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었으므로 사영산<四靈山> 조사암<祖師巖>이라 한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원원사는 밀교의 주요한 도량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가람은 거칠게 다듬은 장방형 석재를 높게 쌓고 그 중앙에 돌계단이 있는 축대 위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절터에는 금당지 등의 건물터, 2기의 3층석탑, 석등과 부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석탑은 동쪽과 서쪽에 세워져 있는데 두 탑의 규모와 양식이 거의 동일하다. 탑은 남아 있는 높이 7.0m로 이중기단에 세워져 있는데, 상층 기단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1층 옥신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 장식석탑이다. 상층 기단 면석에 있는 12지신상은 앉아 있는 자세로 평복을 하고 있으며, 고분에 세워져 있는 12지신상이 서있는 모습인 것과 대비되며 고분에 있는 12지신상이 무기를 들고 있는 것과 달리 평복을 하고 있으며, 옷무늬도 머리 위에 있어 비천상처럼 보인다. 사천왕상은 악귀를 밟고 서있는 자세인데 2기의 석탑 모두 남쪽에 있는 천왕상이 없어진 상태이다. 이들 3층석탑은 양식에 의하여 9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31년에 복원하였다.
양 석탑의 사이에는 화사석이 없어진 석등이 있으며 동쪽 계곡에는 3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서쪽 계곡에도 1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들 부도는 모두 고려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김유신 등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므로 7세기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이 절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4인의 대덕 중 광덕과 대연은 고려 태조를 따른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창건주에 포함한 것은 이들의 유골이 동쪽 봉우리에 안치되어 있는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원원사는 7세기 후반에 창건된 다음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밀교의 중요한 도량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경주 원원사지 근경 금당지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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