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39호 경주 노서리 고분군 <해제>

오늘의 쉼터 2008. 2. 8. 20:14


종     목 사적  제39호
명     칭경주노서리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고분군
수량/면적 44,200㎡
지 정 일

1963.01.21 ~2011.07.28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노서동 104
시     대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경주시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 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린다.

노서리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서봉총·호우총·은령총·제138호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금관총은 1921년에 조사되었는데, 금관과 금제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호화로운 금공예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서봉총은 표주박 모양 쌍무덤의 북쪽 무덤으로,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되었다. 또한 연대를 새긴 은으로 된 뚜껑이 있는 그릇(은합)이 출토되어 5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은령총과 쌍무덤을 이루는 호우총은 광복 후 최초의 유적발굴로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을묘년(451)에 만들었다는 글자가 쓰여진 동합이 출토되었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쌍상총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이, 마총에서는 말뼈와 안장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노서리 고분군은 노동리 고분군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돌무지덧널무덤과 전기 돌방무덤이 밀집해 두 종류의 무덤 교체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경주지역의 무덤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한 인접지역 고분군 통합 ※ 재지정 :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


전문설명

 

경주시내 평지(平地)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 중 서북쪽 부분으로 현재 10여기(餘基)의 대소(大小) 고분이 남아 있다. 외형상(外形上)으로는 모두 봉토분(封土墳)이며 원형분(圓形墳)이 많지만 표형쌍분(瓢形雙墳)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원형분(圓形墳)인 제130호분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鳳凰臺)(제125호분)에 대한 대칭으로 서봉황대(西鳳凰臺)라 불리고 있으며, 황남동 고분군의 황남대총(皇南大塚)(제98호분)과 함께 경주시내 고분군 가운데 최대형 고분에 속한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지는데 금관총(金冠塚)(제128호분), 서봉총(瑞鳳塚)(제129호분), 호우총(壺우塚)과 은령총(銀鈴塚)(제140호분), 제138호분 등은 고신라(古新羅) 특유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었고, 쌍상총(雙床塚)(제137호분), 마총(馬塚)(제133호분), 우총(牛塚) 등은 통일신라기(統一新羅基)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었다.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우연히 유물층이 노출되어 수습조사되었는데, 최초로 금관(金冠)과 금제과대(金製과帶)를 비롯한 각종 호화 유물이 출토되어 경주(慶州)와 신라고분(新羅古墳)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926년에 발굴조사된 서봉총(瑞鳳塚)은 표형쌍분(瓢形雙墳)의 북분(北墳)으로 봉황형 장식(鳳凰形 裝飾)을 얹은 금관(金冠)이 출토되었고, 마침 발굴 당시 내방한 스웨덴 황태자(서전 황태자(瑞典 皇太子))를 기념하여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봉총(瑞鳳塚)에서는[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명문(銘文)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었는데, 신묘(辛卯)는 서기 391년 또는 451년으로 추정된다.

해방 후 최초의 유적 발굴이었던 1946년 호우총(壺우塚) 조사에서는 고구려(高句麗)에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기념하여 을묘년(乙卯年)(서기 415년)에 만들었다는 명문(銘文)이 있는 동합(銅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이상의 고분들은 경주시내 평지 고분군(平地 古墳群)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인 목곽(木槨)이 냇돌로 쌓은 적석부(積石部)로 덮여 있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축조한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약간 늦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속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쌍상총(雙床塚), 마총(馬塚), 우총(牛塚) 등은 봉토(封土) 내부에 깬돌로 평면 사각형의 석실(石室)을 축조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연도(羨道)는 남쪽으로 두었고 석실의 천정은 궁륭상(穹륭狀)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경주분지 주변의 산지에 주로 축조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경주시내 고분군에도 일부 존재함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경주에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은 6세기 전반기부터 등장하나 이 고분들은 석실의 구조와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편들로 보아 그보다는 늦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에는 합장용(合葬用)의 시상(屍床) 위에 인형(人形)을 음각(陰刻)한 석제시대(石製屍臺)와 석침 족좌(石枕 足座)가 놓여 있었고, 완전 도굴분이나 내부에서 말뼈가 나왔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마총(馬塚)에는 연문(羨門)에 석비(石扉)가 아니라 목비(木扉)를 세웠던 흔적이 있었다.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전경

경주노서리고분군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