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이다.
『실록』은 조선 전기에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전주·성주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1592)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선조 39년(1606)에 다시 만들어 춘추관·태백산·묘향산·강화 마니산·오대산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 이괄의 난(1624)과 병자호란(1636)으로 『춘추관본』이 불타 없어졌고, 그 후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에 보관하게 하였다.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현재 서울대학교에 보관되어 있고,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중 없어졌으며, 『오대산본』은 일본에서 거의 불타 없어졌다.
오대산 사고가 있던 곳은 원래 물·불·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사고를 지을 당시에는 실록각·선원각·별관, 그리고 사고를 지키던 수호사찰로 영감사가 있었으며, 참봉 2명과 군인 60명, 승려 20명이 사고를 관리하고 지켰다.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에 탔으나 1992년에 사각과 선원보각으로 이루어진 사고의 건물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문설명 조선왕조의 역대 실록(實錄)을 보관하던 조선 후기 지방 사고(史庫)의 하나로, 원래 조선왕조는 실록을 귀중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여러 질의 실록을 간행한 다음 중앙의 춘추관(春秋館)에 한 질을 보관하고, 나머지는 전쟁의 피해가 미치기 어려운 지방의 깊숙한 산속에 사각(史閣)을 짓고 분산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도 충주(忠州), 전라도 전주(全州), 경상도 성주(星州)에 외사고(外史庫)를 지어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병화로 불타버리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았다. 왜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을 토대로 실록을 다시 인간하고 사고를 재정비하여 춘추관, 정족산(강화도 정족산(鼎足山)), 오대산(강원도 평창(平昌)), 태백산(경상도 영주(榮州)), 적상산(전라도 무주(茂朱)) 등 다섯 곳에 사고를 두었다.
오대산 사고는 1606년(선조 39) 월정사(月精寺)와 상원사(上院寺)의 중간지점인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설치하였다. 이곳은 물, 불, 바람 등 삼재(三災)가 미치지 못하는 명당이라고 한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에 따라 약 2킬로 가다가 다시 서북쪽(왼쪽)으로 1킬로 가량 산길을 올라가면 사고가 있다. 월정사 주지의 책임 아래 그 암자인 영감사(靈鑑寺)(일명 사고사(史庫寺))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며, 설치 당시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수직하였다 한다. 이곳에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 이외에 왕실족보를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도 함께 세워졌다.
오대산 실록은 실록 초본으로서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한 후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다가 1913년 일본 도쿄에 있는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부속도서관에 기증하였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대부분 불타버리고 대출되었던 45책(冊)만이 화를 면하였다. 그중 27책은 1932년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돌아왔는데, 8·15해방 후 서울대학교가 설치되면서 경성제국대학 도서를 인수하는 가운데 오대산 실록도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이관되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이 보관하고 있다.
한편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 건물은 6·25전란 중 1·4 후퇴 때 작전상 불태웠다가 1960년대 후반에 원래의 모습대로 재건하였다. 사고 아래에 있던 영감사도 위치를 옮겨 사고 위쪽에 재건하였다. 현재 이곳은 강원도 평창군에서 관리하며, 영감사 스님이 이를 대행하고 있다.
오대산사고지전경 오대산사고지 오대산사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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