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전문설명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초기 백제(百濟)의 토축 성곽으로 현존하는 성벽의 복원된 연장은 약 470m이고, 당초의 총연장은 둘레 3,740m에 달한다. 원래 이 토성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에 속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토성은 서벽이 가장 불완전한데, 이는 1925년의 홍수 때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성벽 중에서 가장 넓은 단면은 남벽에서 57m나 되는 곳이 있고,높이가 약 6.5m이다. 이것은 축성 당시보다 많이 깎여 낮아진 것으로 여겨진다. 성안의 현재 표토는 홍수 등으로 원래보다 4m나 높아진 곳이 많아 당초는 성안에서의 성벽 높이가 10여m에 달하였고, 성밖에서는 더욱 높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 거대한 규모의 성벽은 단면을 보아 단을 이룬 듯하여, 일정한 높이까지 넓은 폭으로 쌓아올린후, 다시 그 위에 성벽을 구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의 전체 평면은 장방형에 가까운 배(舟) 모양을 이룬다. 북벽과 동벽의 4군데가 단절되어 있는 곳이 성문터로 여겨지고 있으며, 한강유역에 있는 백제의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의 토성 유적이다.
1925년의 홍수때 성의 남동쪽 끝 부근에서 삼국시대의 청동초두(靑銅초斗) 2개가 발견되었고, 1966년의 포함층 조사에서는 선사 시대 이래 원삼국기와 백제 초기(初期)의 각종 토기와 기와류가 층을 이루어 존재함이 밝혀졌다. 1996년의 성의 동북쪽 작은 구역의 조사에서는 지표 아래 약 4m의 바닥에서 원삼국기에서 백제 전기에 해당하는 집터가 떼를 이루고 층위별로 존재하는 사실과 함께, 각종의 토기와 가락바퀴나 그물추 등이 출토되었다.
특징적인 유물들인 토기와 기와는 이 토성의 위상이 몽촌보다도 오히려 높았을 것으로 짐작케하는 것이 많다. 이러한 조사를 통하여 거대한 주거용의 성터임이 더욱 분명하여지고, 이웃한 몽촌토성(夢寸土城)과의 비교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 토성의 축조와 사용 목적에 대하여는 종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기록을 토대로 백제의 방어용 축성으로 사성(蛇城)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위례성(慰禮城)이나 한성(漢城) 곧 이 토성이라는 주장도 있어 왔다.
고고학적 조사의 결과 백제 초기의 대표적 판축(版築)토성이며, 5세기 경까지 존속된 것으로 알려지게 되므로서, 이 토성은 석촌동 고분군과 이웃한 몽촌토성·아차산성 등과 함께 백제 초기의 가장 중요한 도성유적(都城遺蹟)의 하나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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