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검무는 진주지방에 전승되는 여성검무로서 검기무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며 대궐안 잔치 때 행하던 춤의 하나이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칼춤을 춘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 느린타령, 빠른타령에 맞추어 조선시대 무사복을 갖춘 8명의 무용수가 2줄로 마주보고 서서 양손에 색동천을 끼고 칼을 휘저으며 춘다. 춤사위의 종류로는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사위 등으로 다양하며 독특하다. 반주악기로는 피리, 저, 해금, 장구, 북 등이 쓰인다.
현재의 진주검무는 당시 진주감영(현재의 시청)에 속해 있던 교방청(敎坊廳:일종의 기생학교) 기녀들의 의해 전승되던 춤으로 궁중 기녀들이 낙향하여 관청 기녀들에게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검무는 연출형식, 춤가락, 칼 쓰는 법 등 모든 기법이 과거 궁중에서 열던 검무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다.
전문설명
진주검무는 경상남도 진주지방에 전승되는 검무를 가리킨다. 검무는 여러 무원(舞員)들이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戰笠)을 쓰고 서로 맞서서 양손에 쥔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으로, 문헌에는 검기무(劒器舞)로 나오고 속칭 칼춤이라 부르기도 한다.
칼춤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동경잡기 (東京雜記) 』, 『문헌비고 (文獻備考) 』와 같은 문헌에는 가면을 쓰고 칼을 들고 추는 황창낭(黃倡郞)의 검무가 나오는데, 이 검무가 『삼국사기 (三國史記) 』에 나오는 신라 품일장군(品日將軍)의 아들 관창(官昌)의 고사를 춤으로 엮은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검무는 진연의궤(進宴儀軌)와 같은 궁중연향(宮中宴享)에 관한 여러 문헌에 보이는 대로 궁중과 관아의 연향에서 연행(演行)되었다. 그러나 궁중 검무는 전승이 끊어졌고, 관아에서 연행되던 것 가운데 진주와 통영지방의 검무가 전승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진주검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검무는 창우(倡優)들에 의하여 민간연향의 판놀음에서 연행되었고 이런 검무가 아직도 민간검무로 전승되고 있다. 또 무의식(巫儀式)에서 무당이 순박한 칼춤을 추고 있는데 이 춤은 어쩌면 칼춤의 고형(古型)의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진주 관아에는 예로부터 연향에 무원들이 검무를 추었겠으나 지금 전승되고 있는 것은 진주감영 교방청(敎坊廳) 무원으로 있던 최순이(崔順伊 1892년생)가 1906년에 서울 진연도감청(進宴都監廳)에 소집되어 궁중검무를 학습하고 고종황제 앞에서 연행한 뒤 낙향하여 전습시킨 것이라 한다.
최순이의 검무를 이은 이윤례, 김자진(金子鎭), 이음전, 강귀례(姜貴禮), 김순녀, 최례분, 성계옥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는데 김자진, 강귀례는 이미 작고하였다.
진주검무는 8명의 무원이 단복을 입고 남색 띠를 띠고 전립을 쓰고 손에 색동 한삼을 끼고 한다. 도드리장단에 늘어서서 느릿하고 장중하게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다가 한삼을 빼어 놓고 맨손을 뿌리며 입춤사위로 추다가 이윽고 엎드려 숙인사위로 어르며 앉은사위로 춤을 추다가 땅에 놓았던 칼을 양손에 갈라쥐고 씩씩한 타령장단에 칼을 좌우사위로 휘두르며 방석돌이로 돌아가며 장쾌하게 칼춤을 춘다.
진주검무는 다른 고장의 검무에 보이지 않는 여러 화사한 춤사위가 보인다. 근래에까지 검무는 굽은 칼을 썼으나 최근 보유자들은 옛날 방식대로 곧은 칼을 쓰고 있다.
진주검무(쌍어리사위) 진주검무 진퇴무(칼춤) 입춤 진주검무 진주검무 진퇴무 진주검무 한삼입춤(대무) 진퇴무(칼사위) 연풍대(쌍칼사위) 한삼입춤(회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