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각 나라별 유산들

궁궐의 원형 가장 잘 유지한 창덕궁후원은 한국 정통 정원의 멋 일품

오늘의 쉼터 2008. 2. 7. 13:59

     한국 정원의 정수인 후원의 부용지와 부용각                                     사진: 박범용 기자

 

궁궐의 원형 가장 잘 유지한 창덕궁
후원은 한국 정통 정원의 멋 일품

 

창덕궁은 비교적 건물배치가 오밀조밀해 조금은 답답함을 주지만 그 원형 보존은 매우 잘 되어 있으며, 바로 그 옆에 자리한 창경궁은 웅장함을 보여 준다. 물론 구한말에 조성한 경복궁도 시원한 눈 맛과 웅대함을 느끼게 하지만 창경궁은 또 다른 고졸한 맛을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한국 정원의 정수인 후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궁궐의 정문격인 돈화문(보물제383호)을 출발하여 오른쪽으로 돌면 화강암을 사각으로 조형해 만든 아치형의 금천교가 나오는데, 이것은 1411년에 축조한 약 6백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의 석교 중 가장 오래 된 돌다리다.
금천교를 지나 왼쪽으로 정전인 웅장한 모습의 인정전(국보225호)이 보인다. 이곳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현재의 건물은 1804년(순조4년)에 복구한 것으로 조선조 말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약간 위쪽으로는 연이어 선정전과 희정당이 있는데, 선정전은 왕과 신하가 국사를 논의하던 곳으로 우리 궁궐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기와 전각이다. 희정당은 왕의 처소이며 어전회의실로도 사용했다.
다시 희정당 뒤로 대조전(보물816호)이 있는데 이 곳은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왕족들이 생활하던 곳이다. 난방은 목조건물이라 그을림을 막기 위해 숯으로 난방을 했다고 한다. 
창경궁과 인접한 곳에 덕혜옹주와 영왕비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던 낙선재를 지나 숲 속으로 오르면 그 끄트머리에 아름다움의 절정 후원이 나온다. 공식 명칭은 부용지와 부용정이다. 이 후원은 1405년 창덕궁 창건당시 조성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소실되고 지금 남아 있는 누정은 인조 이후 증축된 것이다. 연못인 부용지에는 연잎이 수면을 덮고 있고, 그 가운데 작은 바위섬에 늙은 적송이 긴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다.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건물 배치로 그 조경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답사팀은 다시 수백년 된 적송이 늘어선 숲을 지나 연경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옥의 정수 아흔 아홉간. 순조 28년 당시의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가 '연경당'이다. 사랑채엔 안채가 이어져 있고 사방에 행각들이 늘어서 있다. 이른바 아흔 아홉간 집의 구성이 완비되어 있어 당시 사대부 주택을 잘 보여주며 한국 주택사나 생활사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섬돌 아래 세벌대 댓돌이 있고, 그 앞에 초헌이나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는 노둣돌이 있다. 대청은 4칸이며, 툇마루를 놓았다. 우리 주거 문화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대조전(보물제816호)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왕족들이 살았던 생활공간이다.

 

광해군부터 고종까지 258년의 정궁, 창덕궁

 

창덕궁의 조성사를 살펴보면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다시 복구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했다. 이렇게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벽에 가까운 건물 배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세계문유산으로 등록된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개별적으로는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등이 유형문화재로,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 등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 되고 있다. 한편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 다르게 그 보존상 궁궐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단체에 한해서만 관람을 할 수 있다. 자유로운 관람이 아쉽지만 문화재 훼손을 막고 더욱 잘 보존하자는 뜻에서라니 이것만도 엄숙한 마음으로 감상 할 일이다.
경인매일 조경렬 기자

 


      낙선재 덕혜옹주와 영왕비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