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출판문화의 정수인 금속활자
인류최초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 최초의 인쇄술을 자랑하는 목판 활자본은 751년 이전에 인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라니경>이다. 이는 1450년 독일 쿠텐베르크 보다 700년이나 앞서고 금속활자인 직지심경도 200년을 앞선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서양의 그것보다 200년을 앞선다는 것은 그 민큼 우리문화가 우수한 문화임을 반증하는 증거다.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이 경문은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복원공사가 진행되던 1966년 10월 13일 탑신부(塔身部) 2층에 안치된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때 석탑 내부에서 함께 발견된 총28점의 일괄유물이 1967년 9월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나라 인쇄술이 서양보다 200년을 더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인쇄술보다 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나라는 우선 발견한 인쇄술을 정보의 다량 복제와 유통에 그 목적을 두지 않고 오로지 보학이나 법례 등을 편찬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는 200년이나 뒤졌지만 정보의 복제와 재활용, 새로운 정보의 저장 수단으로 활용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보다 앞서는 발전을 해 왔다.
直指心經
직지심체요절(보물 제1132호)의 원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인데 불조직지심체요절 또는 '직지심경'이라 불리고 있다. 이 직지심경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학승들이 대교과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이다.
직지심경 이색서문
그 주요 내용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오등회원(五燈會元)> 등의 사전(史傳) 관계 문헌을 섭렵하여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긴요한 것을 초록하여 편찬하였다. 권상(卷上)에서는 과거칠불(過去七佛)과 석가모니불로부터 불법을 계승한 천축국의 제1조(祖)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하 보리달마(菩提達磨)까지의 28존자, 그리고 중국의 5조사 및 그 법통을 이은 후세의 국사 중 안국대사(安國大師)에 이르기까지의 것이 수록되었다.
권하(卷下)에는 아호대의화상(鵝湖大義和尙)부터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대령선사(大嶺禪師)의 것도 초록되어 있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를 줄여 나타낸 것이다.
판본은 경한이 입적한 3년 뒤인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초간본(初刊本)이 된다. 상하 2권 중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권 1책(첫장은 결락)뿐이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주자본은 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이 미숙했던 고려시대에 관서(官署)가 아닌 지방의 사찰이 주성하여 찍은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의 모양이 고르지 않고, 부족활자를 목활자로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조잡하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만 전해지던 고려 주자본 중 유일하게 전래된 활자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 되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최초로 금속활자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문화민족임을 실증하여 그 긍지를 세계에 과시한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지난 2001년 9월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문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직지심경을 하루 빨리 반환 받아서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외교적 노력을 통한 반환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
직지심경 성사달서
직지심경이 해외로 유출된 경위는 조선시대 고종때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 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간 장서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그후 골동품 수집가였던 앙리베베르(Henry Vever)에게 넘어 갔으며,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흥덕사의 창건년대와 규모는 알수 없으나,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직지심경 권말간기
직지심경 권말
그러나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수 없던 중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북[靑銅禁口]과 청동불발(靑銅佛鉢)에 "西原府 興德寺(서원부 흥덕사:서원은 신라때 청주의 이름)"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바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하여 주었고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하였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먹, 즉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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