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 덕온공주당의

오늘의 쉼터 2008. 2. 7. 11:56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
명     칭덕온공주당의(德溫公主唐衣)
분     류 유물 / 생활공예/ 복식공예/ 의복
수량/면적 1착
지 정 일 1964.12.07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산8-3 단국대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단국대학교
관 리 자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관

일반설명

조선시대 순조(재위 1800∼1834)의 셋째 공주인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이다. 이 옷은 그녀의 손녀인 윤백영이 저고리, 노리개, 원삼 등과 함께 아버지인 윤용구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7세 되던 해에 대궐에 입궐하면서 자신의 몸에 맞게 고쳐 입으면서 개조하였다.

당의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여인들이 저고리 위에 입던 예복으로, 모양은 저고리와 비슷하지만 앞과 뒤의 길이가 길고 옆이 터져 있는 옷이다. 자주색 비단에 수(壽)·복(福)이라는 글자를 금실로 새겼다.

이 옷은 착용자 신분이 뚜렷하고 연대가 확실한 왕실의 유물로서 조선 후기 상류층의 복식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문설명


19세기의 당의(唐衣)로서 조선조 순조(純祖)의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가 입었던 당의이나, 그후에 그의 손녀 윤백영(尹伯榮)여사가 7세 때 고종(高宗) 내외분을 뵈러 입궐하였을 때 이를 7세의 몸치수에 맞게 줄여서 개조하여 입었으므로 원덕온공주(原德溫公主)의 당의를 개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덕온공주는 헌종(憲宗) 3년(1837) 16세 되던 해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下嫁)하였으나 헌종 10년(1844) 헌종 계비(繼妃)의 간택일에 통명전(通明殿)에 들어가 비빔밥을 먹은 것이 관격(關格)이 되어 궁중(宮中)에서 돌아가셨으나 그대로 덩(승교(乘轎))으로 공주의 자택인 저동궁(苧洞宮)으로 모셔서 장례를 치렀다. 공주가 돌아가신 후 윤용구(尹用求)가 입양하고 이를 줄여서 착용한 윤백영(尹伯榮) 여사는 그의 따님이다.

당의는 조선초의 단배자(短褙子)가 연원이며, 장배자(長褙子)의 원삼(圓衫)에 비하여 짧은 상의(上衣)로서 간편한 예복으로 착용되었던 것 같다. 이런 덕온공주의 당의와 같이 저고리가 곡선으로 된 것은 숙종이후이며, 이는 한국적 선(線)이 완성한 조선후기의 변용이다. 이 곡선은 숙종시대 김덕원(金德遠)의 창의(창衣)와 비슷한 시대에 이 곡선도 고정된 것 같다.

국립박물관(國立博物館)에는 청연군주(淸衍郡主)의 당의가 소장되어 있으나, 현재로서 조선초의 단배자의 실물은 보존된 바가 없다. 다만 전박장군묘출토(傳朴將軍墓出土) 유의(遺衣)에 배자(褙子)저고리가 있어 그 중간적 형태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최근 T.V.에 궁중극(宮中劇)의 범람 때문에 선초나 임란의 궁중 장면을 촬영하는 데 궁녀나 왕비들에게 이 한말의 당의를 입히고 있으나, 이의 고증은 명확히 틀린 것이다. 적어도 숙종이전(肅宗以前)에는 이 당의를 입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리하여 선초(鮮初)에는 단배자(短褙子) 내지 배자(褙子)저고리를 입혀야 할 것이다.

복식(服飾)은 시대(時代)에 따라 그 양식이 달라지므로 출토(出土) 의복(衣服)의 존재는 바로 복식(服飾)의 양식연구에 매우 중요하므로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아울러 윤백영여사(尹伯榮女史)는 순종(純宗) 윤비(尹妃)의 당내로서 조선왕조(朝鮮王朝) 궁중전고(宮中典故)의 최후의 증인(證人)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60년대까지 장서각(藏書閣)에 드나들며 궁중소설(宮中小說)을 탐독하였다. 그분이 소장하고 있던 전래품(傳來品)들은 대개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석주선기념관(石宙善紀念館)이나 세종대학박물관(世宗大學博物館)에서 보관(保管)하고 있으며 학문적(學問的) 연총(淵叢)은 숙명여대 김용숙씨(金用淑氏)가 전수 받아 궁중(宮中) 풍속(風俗)의 연구(硏究)로 정리하였다.

같은 증인으로 최후의 상궁(尙宮) 김동신씨(金東信氏), 성씨(成氏), 박씨(朴氏), 고종(高宗)의 승은(承恩) 내인(內人) 광화당(光華堂) 김씨(金氏) 등이 생존하여 많은 전래품(傳來品)들이 현존하게 되었다. 이런 분들이 최근까지 생존하고 있었다고 하는 면에서 민속자료(民俗資料) 수집이나 정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분들의 지식에 역사성(歷史性)이 없기 때문에 많은 오류(誤謬)를 끼치고 있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덕온공주당의

덕온공주당의(전)

덕온공주당의(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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