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금동관이다. 나주 신촌리 9호 무덤은 1917∼1918년에 일본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금동관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 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내관인 모자는 전북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와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할 뿐만 아니라,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된 백제 관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예로 중요한 유물이다.
전문설명 1917∼1918년경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의 고분군 발굴조사 때 9호분 을관(乙棺)에서 출토된 것으로 유물출토 유적은 현재 사적(史蹟)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대한국의 관모(冠帽)는 문헌기록과 고분벽화에 의해 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신라, 가야고분에서는 순금제, 금동제, 은제의 관모가 출토된 바 있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것은 출토된 예가 매우 희소하다. 특히 백제의 것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기록 이외에는 충남 공주 무령왕릉(忠南 公州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이 유일한데, 이러한 관모나 관식은 지배층의 신분 표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이 금동관의 주인도 당시 상위신분(上位身分)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동관의 외관은 나뭇가지모양의 입식(立飾) 3개를 테두리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어 기본형태는 신라금관과 같으나 입식이 신라관의 출자형(出字形)이 아닌 복잡한 초화형(草花形)이어서 양식상 고식(古式)으로 보인다. 더욱이 내관인 모(帽)는 전북 익산 입점리와 일본 웅본현 국수정 강전선산고분(日本 熊本縣 菊水町 江田船山古墳)에서도 비슷한 예가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교류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영산강유역에서 독특하게 꽃피웠던 옹관 문화를 연구하는데 모두(冒頭)를 장식하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주시 반남면과 영암군 시종면 일대에 가장 밀집되어 있는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 가운데 나주시 반남면 고분군은 그 대표적인 고분으로 분포상으로도 중심지에 해당한다. 이들 옹관고분은 대체로 3세기말부터 조영되기 시작하여 4∼5세기에 크게 성행하다가 5세기 후반부터는 백제계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수용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의 수용은 이 지역이 실질적으로 백제 지배하에 들어갔음을 의미하며, 이는 498년 백제 동성왕(東城王)이 무진주(武珍州)(현재의 광주)까지 친히 내려온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옹관고분의 변화상 등으로 볼 때 신촌리 9호분은 5세기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호족이거나 정치체(政治體)의 최고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의 중앙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최초로 발굴된 유물로서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할 뿐만 아니라,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된 백제시대의 관모로서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예로 백제 관모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예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나주신촌리고분출토금동관 금동관의뒷면 금동관의옆면 금동관의외관 금동관의내관(우측면) 금동관의내관(좌측면) 나주신촌리고분출토금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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