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公主供養舍利)로서,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전문설명
부여(夫餘)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의 탑(塔) 심초석(心礎石) 윗면에서 출토된 화강석제의 이 사리감(舍利龕)은 위·아래로 긴 직육면체의 윗면을 아치형으로 고른 형태로 앞뒷면에 같은 모양의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는데, 전면에 뚜껑턱까지 마련된 감실이 사리봉안처(舍利奉安處)로 사용되었다. 감실은 높이 45cm, 너비 25.3cm, 깊이 25.5cm의 크기로 감실 외면에 뚜껑을 덮기 위해 마련된 뚜껑턱의 깊이 4cm를 제외하면 실제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넣기 위한 공간은 깊이 21.5cm이다. 앞면의 감실 양쪽에는 각각 10자씩의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예서풍(隸書風)이 강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서체로 공주(公州) 무녕왕릉(武寧王陵) 지석(誌石)의 서체와 비슷하다. 아랫줄 4번째의 “(■)”자(字)는 북위(北魏)에서만 사용하였던 별자(別子)로서 백제(百濟)와 북위(北魏)와의 밀접한 교류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문(銘文)의 내용은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公主供養舍利)로서,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사연구에 새로운 금석문(金石文) 자료로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사지(百濟寺址)로서는 최초로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졌으며, 아울러 같은 사지(寺址)에서 발굴된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의 연대도 밝혀져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석조사리감앞면명문의탁본 석조사리감의 뒷면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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