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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황희정승

오늘의 쉼터 2008. 1. 30. 15:22
방촌선생이 출세하기 전에 한 점장이가 하는 말이 ‘앞으로 좌의정이 될 것이며 수명은 70세에 불과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영상이 되고 90세에 돌아가실 무렵 점장이가 찾아가서 하는 말이 제가 사람을 수없이 점쳐 왔으나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는데 황희 선생에게는 영험이 없으니 반드시 음덕(陰德)을 쌓은 까닭입니다.’ 하니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점장이가 한동안 반복해서 묻다가 간절히 조르며 ‘제발 숨기지 마소서’ 하니 그제야 설명하기를 ‘내가 음덕을 쌓은 일은 절대로 없네. 다만 소시에 서울 시장문을 걸어 나가는데 무슨 물건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보니 의외로 한짝의 금잔으로 기이하게 생긴 모양이 보통물건이 아니더군. 서울 문에다 아무날 아무시간에 물건을 잃은 사람은 아무의 집으로 오라는 내용의 방을 붙여 놓았더니 이윽고 한사람이 찾아와서 금잔을 잃었다고 말하더군. 바로 금잔을 내어 주었더니 그 사람이 절하고 감사해 하면서 이 금잔은 어공소(御供所)의 소유로 궁중에는 이 금잔 한쌍밖에 없어 다른 그릇과는 각별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수라를 올릴 때 한잔씩 바꿔가며 사용하는데 마침 내시를 통하여 몰래 가져다가 사위맞는 잔치에 잠시 사용하고 반납하러 오다가 길에서 분실한 것이라며 만약 다른 사람이 주웠던들 어찌 내어 줄 리가 있겠습니까? 애당초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여 죽어도 마땅한데 분실까지 하였으면 연좌되어 30여명이나 죽게 되었을 것인데 지금 이러한 은덕이 어찌 나 한사람 뿐이 겠습니까?’ 하고는 ‘이튿날 준마를 가져왔기에 역시 받지 않았을 뿐인데 이것이 어찌 음덕이 되겠는가?’ 점장이는 매우 감탄하였다.‘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영상에 이르고 수명을 누리는 것은 반드시 그 까닭입니다.’ 이어 금잔을 분실하였던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그 아들이 ‘나의 아버지는 생존에 날마다 첫 새벽만 되면 일어나 절하며 황희정승에게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수명은 90을 누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다가 죽기에 이르러서야 그쳤다.’고 지난 일을 이야기 하였다한다.
서기 1419년에 최윤덕이 개선할 때 임금이 이종무를 맞이하던 예를 따라 몸소 모화관에 나가 맞이하려 하자 황의 등이 말하기를 상왕께서 전에 낙천정에서 종무를 맞아 위로한 것은 우연히 낙천정에 거동하셨을 때 마침 종무가 당도했기 때문이고 오늘의 일은 나라를 수습한 공이 아니고 다만 조그만 도적을 토벌하였을 뿐인데 어찌 몸소 나가 맞이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은 윤덕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모든 장수에게도 차등을 가려 품계를 올려주고 상을 내리는 한편 근정전(勤政殿)에 거동하여 위안잔치를 베풀고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옷과 신을 하사 착용케하고 잔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손수 잔을 들어 윤덕 등에게 권하고 세자를 명하여 술잔을 돌리도록 한 뒤에 윤덕에게는 그냥 앉아서 잔을 받으라고 이르고 군관을 명하여 서로 마주서서 춤을 추게하니 윤덕도 술이 얼큰해지자 일어나 춤을 추었다. 황정승은 집에 있을때는 성품이 너무 너그러운 편이어서 평소에 부인이 말하기를 이러한 분이 어떻게 재상의 중책을 맡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뒤 어느 날 입궐하기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 관복을 갖추었다. 선생은 관복만 입으면 아무리 집에 있을 때도 반드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침 부인이 간단한 음식을 마련하여 앞에 다가오다가 위풍이 엄숙함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리둥절하였다.
거동을 본 황희정승은 웃으며 ‘이제야 재상임을 알았는가?’ 하였다. 언제나 천성이 검소하여 재상 지위에 있은지 수십년 동안에 집안이 쓸쓸하여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볏짚으로 엮은 자리(멍석)에 기거하면서 이 자리가 가려운데를 긁기에 매우 좋다고 하였다. 맏아들 호안공치신이 새집을 지은 뒤에 낙성연을 베풀어 백관을 초청하니 모두 모인 석양무렵이 되어 황희정승이 들어와 집의 구조를 돌아보다가 아무말도 없이 일어서서 나갔다. 이는 구조가 너무 사치스러움을 싫어한 것이다. 좌중은 모두 무색하게 앉았다가 헤어졌고 호안공은 황공하여 즉각 구조를 고쳤으니 가법의 엄격함이 이러하였다. 작은아들인 수신에게 정이 매우 깊었던 기생이 있어 늘 엄격하게 나무라면 예, 예하며 물러 나와서는 끝내 끊지 못하였다. 하루는 수신이 외출하였다가 들어오는 것을 본 황희정승은 관복을 갖추고 문밖까지 나가 맞이하였다. 수신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그 까닭을 묻자, 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너를 손님 대하는 예의로 대하는 바이라고 하였다. 수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청한 뒤 그 후부터는 그 기생과 일체 만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신은 몹시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그 기생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밤중이 되어 술이 약간 깨어 눈을 떠보니 촛불 앞에 한 여인이 가까이 앉아 있었다.
이는 바로 전날 친했던 기생이었다.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어찌 여기와 있느냐 하니 저의 집을 두고 어디로 가겠어요? 한다. 그제야 다시 살펴보니 과연 기생의 집이었다. 크게 노하여 하인을 나무라며 죽이려하자 하인이 변명하였다. 이곳을 지날 때 말이 이 집으로 찾아들기에 소인은 대인께서 고삐를 이 집으로 돌리신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는 수신이 평소 이 집에 왕래할 때 기생이 말을 매 우 잘 거두어 준 까닭에 말이 저절로 이 집으로 머리를 돌린 것이며 사람의 지시가 아닌 것 같았다. 그제야 깨닫고 검을 뽑아 말머리를 치도록 하였다. 황희정승은 일찌기 태학관에 나가 여러 선비를 모아 놓고 문예를 시험하였는데 김광국(金光國)의 나이가 가장 적었다. 그의 문장을 보고는 큰 그릇이 될 것을 짐작하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때 아들 전참공에게 출가하지 않은 딸이 있어 돌아와 전참공의 아내를 보고 내가 오늘 훌륭한 선비 하나를 보았으니 바로 혼구를 마련하여 사위로 맞도록하라 하니 그 사람됨을 본 뒤에 거행하겠다고 하자 즉시 김공을 초청하였다. 김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빈한데다 오랫동안 학관 (學館)에 기숙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남루한 의복에 미투리를 신었고 외모도 별로 특이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달갑게 여기지 않자 그 사람은 반드시 대성할 것이니 놓치지 말라고 이르고 날짜를 가려 손서로 맞이한 뒤에 매우 애지중지하여 항상 상국랑(相國郞)이라 불렀는데 과연 좌의정이 되었다.
황희정승이 참찬(參贊)으로 있을 때 황해도에서 10여세 된 아이종을 데려가다 자제들의 글방 심부름을 맡겼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조금도 틀림없이 줄줄 외웠다. 기이하게 여겨 즉시 양인(良人)으로 만들어 주려고 먼데로 떠나 보내면서 당부하였다. 삼가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딴 데로 옮겨 살면서 학문이 있는 사람을 찾아 몸을 의지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니, 다시는 이곳 에 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는데 그후 10여년이 지난 뒤 정시(庭時)에서 5, 6명이 뽑힌 가운데 황해도에서도 한 사람이 참방(參榜)이 되었다. 그때 황정승은 영상으로 있었다. 급제한 선비들이 모두 뵙기를 청해 오는데, 맨 뒤에 한 선비가 말에서 내리더니 문에 들어서자마자 꿇어 엎드리는 것이었다. 황희정승이 보고 그대는 어찌하여 그처럼 공손하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잡아 자리에 앉히니 그 선비가 어렸을 적의 이름을 대었다. 그러자 더 이상의 말을 못하게 하고 후의로 대접한 뒤에 가만히 일렀다. 너의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면 혹 벼슬길에 구애를 받아 좋은 명망을 기대하기 어려울까 염려되니 십분 조심하라고 당부하자 그 선비는 황공하고 감격해 하며 물러간 뒤에 큰 벼슬에 올라 지위와 명망이 대단하였으며 그의 성은 오(吳)라 하였다. 그후 재상으로 있은지 20여년 동안에 대사만을 힘써 왔으므로 매일 아침에 간단히 문안을 드렸고 육조판서들도 다만 공사에만 의견을 거론케 하였고 문전에는 타고온 말이 없었다. 혼자 우뚝 앉았다가 공사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고관이라도 반드시 의장에 옮겨 앉아 만나 보았다.
하루는 이조판서가 가정사를 아뢰고 나서 꿇어 엎드려 간청하기를 아무 날 혼사가 있으 니 대감께서 왕림해 주시면 감격하고 영광스럽기 이를 때 없겠습니다. 하니 아무 대꾸도 없었는데 그가 물러간 뒤에 대관(臺官)이 감히 영상을 초청하였다는 죄를 노하여 마침내 중벌에 처하게 되었다. 황희선생도 처음에는 두문동에 들어가 일생을 마칠 뜻을 두었다. 태조 원년(1392)에 경학이 밝고 수행이 단정한 선비를 채택할 때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두문동 제현들이 구부(懼夫)가 나가지 않으면 창생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권하고 도 소명이 계속되자 할 수 없이 하산하게 되었다. 정건천이 그의 부채에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고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서네 청운과 청산이 이로부터 멀어지니 눈물이 벽라의(碧蘿衣)에 젖는구려.」라는 당인(唐人)의 시를 적어 주며 전송하였다. 〈정건천문집〉 개성부 송악산에 용암 폭포가 있다. 날아서 내리지르는 모습이 마치 무지개와 같고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끊임이 없었는데, 익성공이 잉태되던 날에는 냇물이 뚝 끊겨 열 달 동안 한 모금의 물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공이 태어난 뒤에는 물이 다시 이전처럼 흘러내렸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이 산천의 정기를 품수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이는 옛날 미산의 풀이 말라 죽던 예와 비슷한 일이다. 〈박씨소기 박세상〉 황익성공 희는 고려 말기에 적성의 훈도(訓導)로 있었다. 하루는 적성에서 송경으로 가는 길에 한 노인이 노랗고 까만 소 두 마리로 밭을 갈다가 막 쟁기를 떼어 놓고 나무 밑에서 쉬는 것을 보았다. 공도 그 옆에 말을 쉬이며 노인에게 말을 붙였다. 「노인의 두 마리 소가 다 살찌고 건장한데, 밭갈이할때 힘에는 우열이 없소?」하자 노인이 입을 공의 구에 대고 속삭였다. ‘저 빛깔의 것은 쓸만하고 이 빛깔의 것은 뒤지오.’하였다. 이에 황희정승은 ‘노인은 소가 무엇이 그리 꺼려서 이처럼 속삭이는 거요?’하자 ‘답답하오. 손님이 아직 연소하여 물정을 모르는구려. 짐승이 비록 사람과 말은 통하지 못하지만 말의 좋고 궂은 것은 환히 짐작하므로, 만약 자기가 못나서 남에게 뒤진 다는 말을 듣는다면 불만스레 여기는 마음이 어찌 사람과 다를 바가 있겠소?’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였다. 공의 한 평생 겸손하고 인후한 덕량은 그 노인의 한 마디 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 말기에 어진이로서 농사에 숨은 이가 많은데 그 노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다. 황익성공이 수상으로 막 조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 한 노인이 남루한 의복에 지팡이를 끌고 앞에 나타나 익성의 자를 부르며 말하였다. ‘내가 지금 자네를 만나러 왔는데 어디를 가려는가?’ 공이 수레를 멈추고 대답하였다. ‘마침 공사가 있네. 바로 돌아올테니 내집으로 가 밥을 달라 하여 들면서 기다리게.’ 노인은 곧장 공의 집에 이르러 공의 자제에게 말하였다. ‘너의 부친이 나더러 집에 와서 기다리라고 하였으니 어서 밥이나 가져오너라.’ 노인의 요구대로 밥을 지어 대접하였는데 조금 뒤에 공이 돌아와 노인과 한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방안에 드러누워 너니, 나니 하면서 말을 주고 받았는데 이야기한 바가 무엇인가는 아무리 집안 사람이라도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떠나는 날 공에게 요구하였다. ‘요즘 식량과 찬거리가 떨어졌네.자네가 좀 도와주지 않겠는가?’ 공이 몇 가지 찬거리와 식량을 약간씩 자루에 넣어 청지기에게 맡기면서 노인이 가는 데까지 메어다 주라고 일렀다. 노인은 경양진을 지나 관악산 아래 이르러서는 줄곧 산으로 올라 서서 중턱에 멈추더니 청지기에게 물었다.‘너는 조반을 들었느냐?’청지기가 들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갈 길이 아직도 멀었으니 식사를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고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을 가리키며 ‘저 집 주인은 나와 절친한 사람이다.
네가 찾아가서 내말을 이르고 밥을 청하면 반드시 후하게 대접할 것이다. 나는 잠시 이 나무 아래 앉아서 너를 기다리겠다. ’ 청지기가 그 집으로 가서 노인의 말을 소개하자 주인이 그 늙은이가 대체 누구이며, 네가 무엇하는 자이기에 밥을 달라고 하느냐고 꾸짖으며 몽둥이를 휘둘러 내쫓았다. 청지기가 멍해진 표정으로 노인이 있던 곳에 돌아와 보니 노인과 짐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송과 잡기〉 공이 급제하기 전에 처가에서 덧붙어 지냈는데 말과 웃음이 드물고 늘 눈을 감은채 앉아 있기만 하므로 사람들이 바보로 취급하였다. 마침 처가에 불량한 하인 하나가 있었다. 주인이 제거하지 못하여 매우 고심해 오던 어느 날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대가 그놈의 버릇을 고쳐 줄 수 있겠는가? 공은 그러하겠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하루는 그 하인이 술에 만취하여 주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공이 듣고 다른 하인에게 점잖게 일렀다. 저 놈을 잡아 오너라. 하인이 나갔다가 그냥 돌아와 말하였다. 그놈이 만취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쓰러져 있으면 끌어 오너라. 하인이 다시 나간지 한참 뒤에 상투를 잡아 끌어왔다. 작도를 가져 오너라. 하인이 웃으며 작도를 가져다 앞에 놓았다. 저 놈의 목을 끌어다 도판(刀板)위에 올려놓아라. 하인이 혼쭐을 내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웃으면서 시키는 대로 하자 공이 별안간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어서 작도를 밟으라고 호령하는데 그 눈이 전광과 같았다. 하인이 깜짝 놀라 작도를 밟아버리자, 목이 잘려지고 말았다. 그 후 부터는 사람들이 모두 공을 두렵게 보았다.
각처 고을에 있는 창기를 폐지하자는 주청이 있자, 임금이 회의에 부쳤다. 다른 대신들은 다 폐지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말하였는데 아직 공만의 의견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공에게도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공의 제의는 의외로 달랐다. 남녀란 사람의 큰 욕정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므로 금제 할 수 없으며 각처 고을에 있는 창기는 관가의 소유로 누구나 이용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폐지한다면 연소한 조관으로 외방에 나간 자가 여염집 부녀를 불의로 탈취하여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므로 신의 의견에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공의 제의에 따랐다. 〈동야야집〉 황공이 입궐한 사이에 부인 양씨가 좋은 배 몇 개를 얻어 공에게 드리기 위하여 시렁 위에 얹어 두고 잠시 친가에 갔었다. 공이 퇴청하여 내실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시렁 위에서 쥐가 자꾸 들락날락하면서 그 배를 훔쳐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배가 둥글고 미끄럽고 또 커서 입으로 물어가지 못하더니 이윽고 다른 한 마리가 나타나 한 마리는 배를 안은 채 벌렁 드러눕고 한 마리는 배를 안고 있는 쥐를 물고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이런 방법으로 배를 몽땅 훔쳐가는 것이었다. 얼마 뒤에 부인이 들어와 배를 찾아 보았으나 한 개도 없었다. 공에게 물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부인이 노하여 집을 보았던 어린 비녀를 추궁하였는데 그 말이 궁색하였다. 드디어 회초리로 때리자 겨우 두어대를 맞고는 제가 훔쳐 먹었다고 자백하였다. 공은 죄없이 억지로 자백하는 것을 보고 한동안 내심 탄식하였다. 며칠 후에 조정에서 그 일을 이야기하고 이어 여쭈었다.
지금 국내에는 반드시 애매한 형을 받은 자가 많을 것입니다. 임금이 즉시 행회(行會)에 명하여 오래 동안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하자, 경향 각지에 있는 옥들이 일시에 텅 비게 되었다고 한다. 건국초기에는 한 차례의 형(刑)에 매 백대로 되었는데, 공이 이를 계기로 너무 중하다고 건의하여 삼십대로 감하였다고 한다. 〈창계록에 임영〉 황익성공은 평소 집에서는 담담하여, 아무리 아손(兒孫)과 어린 종들이 몰려들어 울고 장난을 쳐도 일체 금제하지 않고 혹 수염을 잡아당기거나 뺨까지 때려도 내버려 두었다. 하루는 속관(屬官)을 데리고 일을 의논하다가 붓에 먹을 찍어 막 문서를 작성 하려는데, 한 어린 종이 종이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은 노한 기색이 없고 다만 손으로 씻어버릴 뿐이었다.(명신록에 보임) 〈청야집 이해조〉 공이 재상으로 있을 때 김종서가 공조판서가 되었다. 하루는 공소에 모였는데, 종서가 공조(工曹)를 시켜 약간의 주과(酒果)를 준비해 올리게 하였다. 공이 노한 표정으로 「국가에서 예빈사를 정부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위함이다. 만약 출출하면 의당 예빈시를 시켜 준비해 와야 될 터인데 어찌 사사로이 공조에서 준비하였는가?」 고 말하고, 종서를 앞으로 불러 매섭게 질책하였다. 금상 극성(金相克成)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이 일을 이야기하고 나서, 「대신이란 마땅히 그러해야만 조정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로 아뢰었다.
(명신록과 동각잡기) 일화1 황희는 집에 있을때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항상 곧은 자세로 앉아 책을 읽었다. 하루는 웬일로 바깥이 떠들썩하였다. 두 계집종이 서로 잘했느니 못했느니 바락바락 고함치며 다투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 종의 하나가 황희 앞으로 들어와 땅을 치며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 집안사람들에게도 상대가 아이든, 어른이든, 가족이든, 종이든, 가리지 않고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는 황정승이었다. 그런 까닭에 계집종은 황희앞에서, 감히 땅을 치며 하소연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분이년이 쇤네한테 마구 욕을 하고 있어요. 제가 잘못해 놓고서는 되려 쇤네를 욕하옵니다.” 분이를 꾸짖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이란 계집종도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아니옵니다. 대감마님 쇤네가 잘못이 아니옵니다.” 이에 황희는 부드러운 웃음을 짓더니 두 계집종을 번갈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무슨 대답이 그러냐는 듯이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빠진듯 황희를 쳐다보았다. 갓 쓰고 점잖게 앉아있던 황희의 조카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무슨 대답이 그리 흐리멍텅하게 하십니까? 누가 한 짓은 어디가 잘못이니 어떻게 하라든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따지고 가려주셔야지요.”하니 황희는 잠시동안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도 또한 옳은 말이다.” 이번에는 무슨 뚜렷한 말씀이 계시리라고 생각하던 방안 사람들은 또 한번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시면 싸움의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도록 잘라 말씀하셔야지요.”조카가 다시 말하였다. “아니다.” 간단한 대답할뿐 황희는 입을 다물고 책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골라내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제가 한 일부터 되새겨 보아야 한다. 자기의 잘못을 먼저 깨닫고 보면 옳거니 그르거니 싸움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황희는 그렇게 말할 노릇이었으나 짐짓 입을 다물어 버린것이었다. 일화 2 명나라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새 한쌍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 새를 키워서 보내라고 했는데 어떤 것을 주어도 먹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 아니 걱정거리가 아니겠는가? 조정 대신이 며칠씩 모여 상의했으나 별 묘안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이때 한 신하가 품 하기를 황희 황정승께서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니 생전에 무슨 말을 남긴 것이 없나 알아봄이 어떠하냐고 제의를 했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내서 알아 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남아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돌아가시려 합니까? 하니 황정승 말씀하시기를 공작도 거미줄을 먹고 사는데 산 사람입에 설마하니 거미줄이야 치겠소)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미줄을 걷어다 먹였더니 사경에 이르렀던 새는 그 거미줄을 주는대로 먹고 잘 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명나라 사신이 와서 죽을 줄만 알았던 공작이 보다 더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서는 본국에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니 명나라 황제는 감탄하며 ‘황희가 세상을 떠나 조선에는 명인이 없는 줄 알았더니 아직도 그만한 인물이 또 있구나!’ 하며 다시는 소국이라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황정승이 평소에 청빈한 생활로 이어오다가 가족들에게 유언한 것이 국가명예까지 공헌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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