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보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오늘의 쉼터 2008. 1. 19. 20:39



종     목국보  제45호
명     칭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소조/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부석사
관 리 자부석사


일반설명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설명


쌍봉사 경내의 북쪽에 있는 이 탑은 8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신라(新羅) 최고의 우수한 부도(浮屠)이다. 신라의 여러 부도 중 각부(各部)의 조각이 가장 화려한 최대의 걸작품으로 상·하 각부가 조화되어 있고 장중한 작풍(作風)을 느끼게 한다.

평면이 팔각형을 이루고 있음은 통식에 속하는 2단을 이룬 하대석(下臺石)에는 하단에 운문(雲紋), 상단에 사자(獅子)를 조각했고 상대석(上臺石)에는 앙련(仰蓮) 위에 팔각 괴임대가 있다. 탑신(塔身)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 비천상(飛天像) 등이 조각되었고 옥개석(屋蓋石)은 기왓골을 조각하되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木造) 건축(建築)의 의장(意匠)까지 보이는 등 석조(石造) 건축물(建築物)로서는 물론 조각으로서도 극치를 보이고 있다.

건조연대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8년(868)으로 추정된다.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안에 마련된 동향(東向) 불단 위에 안치된 거대한 불상으로,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이 불상은 소조상(塑造像)으로는 최대(最大) 최고(最古)의 상으로, 나발(螺髮) 머리 위에는 육계(肉계)가 큼직하고, 얼굴이 풍만하다. 정안정시(正眼正視)의 미목(眉目)에는 위엄이 있고, 두꺼운 입술에서 고려불(高麗佛)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양쪽 귀는 긴 편이며, 잘록한 목에는 과장된 삼도(三道)가 보인다. 우견편단(右肩偏袒)한 법의(法衣)는 앞쪽에서 평판(平板)을 겹친 것 같이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렸고, 두 무릎의 의문(衣文)은 평행선으로 각각 밖을 향하여 흘러내렸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미 도피안사주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鑄造毘盧舍那佛坐像)(국보 제63호)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상 뒤에는 목조(木造) 광배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원권(圓圈)으로 구별하고 각각 우아하고 화려한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조각하였고, 그 안에는 두광에 3체(體), 신광에 4체(體)의 심불(心佛)을 달았던 흔적이 있으며, 가장자리는 화염문(火焰文)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좌(臺座)는 앞면 너비 2.37m, 측면 너비 2m, 높이 1.05m의 흙과 돌을 섞은 수미단(須彌壇) 원형이 남아 있고, 바닥에는 주위에 신라시대의 녹유전(綠釉塼)이 깔려 있으나, 불상 무릎 아래에 후세의 첨가물인 목조불단이 가설되어 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불상은 신라(新羅)시대 불상의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지만, 도식적이고 상징적인 일면을 감출 수 없어, 시대적인 양식의 차를 보여 주고 있다. 온몸에 금빛이 찬연하고, 고려불(高麗佛)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특히 소상(塑像)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작품이다.

신라(新羅)시대의 조상(造像)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손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