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감상/대중가요1

스텐카라친 - 이연실

오늘의 쉼터 2007. 12. 31. 20:23
스텐카라친 - 이연실
이연실의 넋두리 전부! (1982)
이연실 Lee, Yeon-Sil / 여성솔로 (보컬, 기타)
B - 1. 스텐카 라친
     
넘쳐 넘쳐 흘러가는 올가 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노래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는 공주의
웃음띄운 그 입술에 노래소리 드높다
동편저쪽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우리다
다시 못 볼 그 옛날에 올가 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그토록 슬프고 그토록 생생한 나의 노래여!
우리 노래의 첫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박인희와 이연실. 그들은 여느 가수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바로 고백하자면, 그들은 여옥의 후예들이다. 백수광부의 처가 불렀던 노래가 되기 전의 노래에 곡을 붙이고 말을 만든 여옥처럼 그들은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육성에 음악이라는 옷을 입혔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성장했고 내 성장 주기는 그 노래를 들은 횟수와 정확히 비례한다.
(중략)
이연실의 노래들도 그러긴 마찬가지였다. 듀엣 한마음 출신의 양하영이 어느 고아원에서 그들과 함께 눈물을 철철 흘리며 부르던 <찔레꽃>이나 봄의 눈부심, 그 찬란한 생명의 태동을 이만큼 더 꿋꿋하게 표현한 곡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민들레>나 6,70년대적인 정서가 그대로 배여 있으면서도 지금 들어도 결코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목로주점>이나 첫사랑의 아픔이 초경의 비릿함처럼 묻어나는 <새색시 시집가네>나 소월의 시에 가락을 붙인 <부모>도 정겹기가 그지없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번안해서 취입했던 <스텐 카라친>이나 <릴리 마를렌> 혹은 더 나아가 우리의 구전민요나 광복군의 노래에서 차용한 <타박네>나 <고향꿈> 같은 곡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의 서유석이나 양병집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박인희처럼 이연실 또한 단순한 번안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줄 알았던 포크 싱어였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다른 점이 있다면 박인희가 노래에 담겨있는 서정적인 감수성에 치우쳤다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이연실은 포크송만이 지닐 수 있는 민중들의 끈질긴 정한을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러한 미덕은 방의경의 <불나무>나 <내 집>, <폭풍의 언덕에 서면 내 손을 잡아주오>나 김인순의 <나비야>와 <하양나비>, 윤연선의 <그 소년>, <고아>, <님이 오는 소리> 그리고 박영애와 이현경의 <아름다운 사람>이나 <그리워라>, <초겨울> 같은 곡으로 흡수되고 확장된다. 그러니까 서유석의 <친구야>나 <그림자>, 양병집의 <부활가>나 <엄마, 엄마 아-엄마>에 나타난 짙은 사회성과 정치성의 또 다른 지점을 이연실이 열어놓았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객관적일 것이다.
아, 그러나 어찌됐든 윤명환의 곡 <오늘 같은 날>이나 <솔개>, <종이꽃>을 부르는 이연실, 그녀의 음성은 서늘하다못해 고혹적이다. 그녀의 음성엔 향토적인 애잔함과 그리움도 녹아있지만 도회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의 향취도 진하게 배여 있다. 그러니까 다들 이연실, 이연실 하는 걸까. 뭐라고 정확하게 꼬집어낼 수 없는 그 미묘한 음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출신의 여성가수 토니 차일즈와 애팔래치아 산맥의 작은 마을에 은둔했던 제인 리치의 염세적인 슬픔이 깃든 허스키한 목소리를 연상시킨다. 하여, 이연실이 청중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꽃반지 끼고>의 은 희가 자아내는 청정무구한 애수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겠다. 곽성삼이 <귀향>이나 <나그네>, <길손> 등에서 추구한 고향의식과 박동률이 <고향가는 길>과 <굴렁쇠>, <잃어버린 시간>에서 보여준 사라진 고향에 대한 생각이 다르듯이.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 이연실, <찔레꽃> 전문
찔레꽃을 부르며 나는 울었다. 가시에 찔려서도 아니고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단지 한 사람이 그리워서였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였다.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어서였다. 그이는 이곳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 지상에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와 나는 같은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다.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차를 마시며 웃을 수도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잘 수도 없다. 그가 옷을 입는 방식에 대해서 흉을 볼 수도 없고 팔짱을 끼고 행복한 웃음소리에 파묻혀 산책을 할 수도 없다. 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는데 그를 이제 더 이상은 볼 수 없다는 이 맹목적 현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아니, 그것은 아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일 것이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나는 무서운 것이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부재에 대한 어떤 위안이나 상황설명도 그가 내 눈앞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진실을 은폐할 도리는 없다. 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이라는 불가의 보편적인 법리를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가 않다. 존재의 부재와 현존에 관한 문제는 시각적인 것이다. 청각과 후각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오감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없음으로 인해 벌어지는 그 모든 실존의 현상들을 마주하기가 겁이 난다. 슬픔의 무게와 상실의 아픔을 감당할 수가 없다. 고통스러운 것은 끝끝내 고통스러움 그 자체일 따름이다.
이연실의 노래는 내가 사랑했던 대상이 이제는 멀리 떠나버려서 다시는 내게로 되돌아올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나는 다만 그의 노래를 가끔씩 흥얼거리면서 어리석은 추억과 감상에 젖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러한 추억과 감상이 그의 순전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화하는 날, 나 역시 그들을 미련 없이 떠나보내야 함을 알고 있다. 가슴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내야 함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도. 그러나 그 순간이 오기까지는 나는 여전히 바람 불고 비오는 날 혹은 문득문득 누군가가 아무 허락도 없이 내 마음의 빗장을 부수고 내 속으로 쳐들어는 날이면 기꺼이 그들에게 나를, 내 영혼의 전부를 송두리째 온전히 내맡길 준비가 되어 있다. 내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겠는가.

 

이연실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 나는 그의 노래가 되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때로 내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나를 흔드는 노래 그리하여 내 생의 일부가 되는 노래, 그 노래는 내 몸과도 같다. 노래가 몸이 되고 몸이 노래가 되는 경지, 노래에 취해 내 몸이 대기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어떤 떨림의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아닌 나, 단백질의 분자로 구성된 유기물질이 아닌 신성한 존재감에 전율하는 그 무엇. 그것이 무엇이라 한들 어떠랴. 이연실의 노래는 나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 향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내가 향수의 주체가 되어 그의 노래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내 눈앞엔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는 '나'의 영혼과 '그'의 영혼이 자유롭게 교감하는 무한 혼융(混融)의 세계이다. 비유는 낡아도 결코 낡을 수 없는 생처럼 그렇게 그의 노래는 살아있다. 김혜린의 <비천무>와 오 수의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에서처럼.
글 출처 :  웹진 가슴 최창근 2002/06/22 

 

"동편 저쪽 물 위에서"라는 가사는 "돈 코�(돈강 유역의 코사크족 혹은, 카자크족)의

 

 무리에서"라는 가사가 와전된 가사인 듯 하다고 한다.

 

스텐카 라진[Razin, Stepan Timofeyevich, 1630?~1671.6.16] 이라고도 한다.

 

돈 지방의 카자크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카자크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증오하여,

 

무산(無産) 카자크와 도망 농노(農奴)를 규합, 166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볼가강 하류와

 

카스피해 연안을 횝쓸고 다녔다.
1670년 다시 볼가로 진출, 강어귀의 아스트라한을 점령한 뒤 북상(北上)하여 볼가 중류까지의

 

광대한 지역의 농민을 지주와 관리들에 대항하는 반란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그해 10월 반란군은 심비르스크(현재의 울리야노프스크) 교외에서 정부군에 대패하여,

 

라진은 남쪽으로 도망쳐 돈에서 재기(再起)를 꾀하였으나, 이듬해 4월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 처형되었다.

 

이 반란은 러시아 역사상 대규모 농민반란으로서,

 

그는 민요(스텐카 라진)로도 불리어 오랫동안 러시아 농민의 기억에 남았다.
여름에는 그런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데 지금처럼 늦가을이나 겨울만 되면 시베리아와

 

러시아의 대지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70년대 이연실이 이 노래를 부를때 기관에서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저리 짜집기 했기에 글과 사진과 노래의 출처를 밝히는게 웃기는것 같아서 고마

 

그냥 통과^^ 이럴땐 동네장사가 편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1917년 혁명 후, 내전기 백군이 7년에 걸쳐 가장 치열하게 적군에 저항한 격전지로 유명하며,

 

솔로호프의 노벨상 수상작인 <고요한 돈 강>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그 후 정부의 집중투자로 대규모 공장, 특히 트랙터 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업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 2차대전 중에 200여일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나, 제대로 성한 건물하나 남지 않은 폐허가 되었다.전쟁후 대대적인 복구작업에

 

착수해 1950년대에는 세계 제1의 담수량을 자랑하는 볼가강 하류 볼시키시에 유럽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완공되었다.

 

값싼 전력을 이용하려는 각종 중화학공업, 군산복합체도 집중적으로 들어서고 러시아의 핵심

 

공업 지역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

 

1961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볼고그라드(Volgograd)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연실, 그 청아한 음유시인의 기억
유행가, 혹은 대중가요라는 이름은, 그 의미 만으로 보자면 시(詩)와 다르지 않다.

 

시는 한때 한 시절 사람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유행의 노래이며 뭇사람들이 즐기는

 

신명의 가락이었다. 지나간 가수 중에서 가장 시인다웠던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박인희를 들겠다.

 

그녀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그대로 낭송했고 '세월이 가면'은 곡을 붙여 불렀다.

 

박인환의 이 시들은 박인희의 그 곱고 애절하면서도 절제있는 목소리를 통해야

 

제 맛이 날 정도다.

 

박인희의 '모닥불'이나 '끝이 없는 길' '얼굴'은 한 시절을 감전시킨 음표의 시(詩)다.

 

그 노래들은 넋나간 듯 늦가을 밤을 지키며 모닥불 가에서 목이 쉬도록 불러야 원음(原音)이

 

나온다.
박인희 뿐 아니라,

 

서유석이나 정태춘에게도 시와 대중가요의 쿨한 만남은 계속된다.

 

그들 또한 모두 각자의 물길로 각자의 노를 저어 각자의 빛깔로 각자의 소신으로 저쪽,

 

시의 등대가 희부윰한 안개 속을 멀리까지 저어나간다.

 

하지만 나는 박인희의 시대에 등장해, 알 수 없는 신비감으로 귀를 사로잡았던,

 

어쩌면 그 야릇한 비현실감 때문에 유령처럼 느껴지는 한 여자를 기억한다.

 

그가 이연실이다. 이연실의 '찔레꽃'과 '새색시 시집가네' 그리고 '타박네'는 산업화의

 

멀미 속에서 성장정지의 볼멘소리같은 어린 중얼거림이 기이한 공명으로 울려퍼졌다.

 

그가 저 향토빛 노래를 부를 때면 그에겐 찔레꽃 민들레 향기가 났고 그의 고무신엔 흙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스텐카라친'이나 '릴리 마를렌'을 부를 땐, 꿈의 담장을 넘어 엿보았던

 

그 낯선 풍경 속에서 히아신스를 꽂은 소녀가 돋아났다. 

 

그 이국적인 정조는 감미와 퇴폐가 설탕과 프림처럼 섞여 혀끝으로 녹아든다.
내가 한 시절 가장 매료됐던 그녀의 노래는 '조용한 여자'이다. 어젯밤 꿈 속에서

 

보랏빛 새 한 마리, 밤이 새도록 쫓아헤매다 잠에서 깨어났지요,로 시작하는

 

그 노래. 이제 막 그리움의 초경(初經)을 시작하는 풋소녀의 싱숭생숭을 마치 숨소리 붙들듯

 

잡아낸 멋진 노래였다. 하지만 '나는 소녀가 아니고 여인 또한 아직은 아니지만,

 

장발 단속엔 안 걸리니 여자는 분명 여자지요'라고 말하는, 어렴풋한 정체성의 인식은

 

그녀가 꿈에서 발견한 보랏빛 새처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비치는 달콤한 세상으로 향해 있다.

 

나는 조용한 여자를 통해, 여자의 마음을 엿보았고, 그녀를 통해 여자의 눈을 만났다.

 

조용한 건, 다름이 아니라, 그녀를 노크해줄 어떤 존재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의

 

고요이다.

 

순결이란 어쩌면, 아직 사건이 시작되지 않은 영화를 보는 설렘과 기대처럼, 두근거리는

 

퇴폐의 기분이란 걸, 저 노래는 가르쳐주었다.

 

이연실의 목소리는 감정을 가공하지 않고, 슬픔을 더 보태지 않은, 교태도 섞지 않은

 

맑은 물소리같이 흘러들어온다.

 

잡티가 섞이지 않았기에 어쩐지 불안하고 어쩐지 서글프고 어쩐지 외롭다.
대중가요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를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연실의 '소낙비'를 얘기하리라.

 

이 희한한 번안곡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의 장면들에서 느끼는 시적인 설렘,

 

혹은 요즘의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등의 판타지 영화의 매력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담고 있다.

 

검은 고깔모자를 쓰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와, 그 아래 크레용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세상. 세상을 덮는 소낙비의 눈으로 바라본 풍경들은, 어쩌면 우리의 상상력이

 

그리지 못했던 상쾌하고 따뜻한 세상을 스냅스냅으로 보여준다.

 

빗소리를 타고 날아다니는 노래, 마녀와 세상이 공존하는 노래, 어쩌면 현실의 최루탄과

 

억압적 공기를 피해, 꿈으로 달아난 사람들이 바라본 한 바탕의 '헛 것'들. 그게 아프고도

 

감미롭게 붙들린다.

 

나는 '소낙비' 만한 음유시를, 이연실같은 음유시인을, 이후 들은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과연 그런지 빗소리에 젖어보시라. (2004, 11, 4)

 

글 출처 :
옛날다방 (빈섬)

 

 

 

사랑하는 여인을 물속에 집어 던진 비운의 영웅 - 스텐카 라진
‘넘쳐 넘쳐 흐르는 볼가 강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띠운 그 입술에 노래 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무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 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일제 강점기에 항일독립군의 애창곡이었던 ‘스텐카 라진’의 노랫말이다.

 

구슬픈 곡조의 이 러시아 민요에는 한때 러시아 온 땅을 톺고 지나간 반란의 주인공

 

‘스텐카 라진’의 비극적 사랑이 담겨 있다.

 

1980년대 포크가수 이연실이 번안곡을 부르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노랫말의 주인공 스텐카 라진(1630~1671)은 러시아 남동쪽 돈 강 근처의 부유한

 

‘카자크(Kasak, 자유인)’집안에서 태어났다. 카자크는 개간한 땅에 농사를 짓거나,

 

숲에서 사냥을 하며 사는 무리였다.

 

그 틈에 태어난 스텐카 라진의 원래 이름은 ‘스테판 라진(Razin, Stepan)’이었다.

 

하지만 그는 풍족함을 버리고 가난한 카자크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스텐카’라는

 

속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 바실리 수리코프, '스텐카 라진', 1906,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박물관 소장.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여전히 농노제가 시행되는 낙후한 봉건국가였다.

 

농노들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하며, 남는 시간에 소작지를 경작했다.

 

그나마 수확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중삼중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노들은 몰래 도망쳐서 카자크에 합류하였다.

 

그런 와중에 카자크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간섭이 심해졌다.

 

그러자 카자크들은 발끈하였고, 마침내 1667년에 무력봉기를 일으킨다.
카자크 무리는 스텐카 라진의 지도 아래 대상인과 귀족에 대한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많은 식량과 옷, 보석 등을 빼앗아 주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후 2년간 스텐카 라진은 볼가 강 하류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스텐카 라진은 농민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다.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더 많은 식량과 물자가 필요하게 됐다. 고심하던 스텐카 라진은 페르시아로 눈을 돌린다.
1670년, 카스피 해의 검은 물결을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한 라진의 군대는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잡아왔다.

 

그 소식에 힘을 얻은 러시아 농민들은 곳곳에서 스스로 봉기를 일으켰다.

 

더불어 라진의 군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볼가 강 유역의 볼고그라드와 아스트라한에 이어 사라토프, 사마라 등의 도시를

 

차례로 굴복시켰다.

 

그들 앞에는 어떤 적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문제가 반란군의 발목을 붙들었다.

 

스텐카 라진이 페르시아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공주의 미모에 취한 스텐카 라진은 정신 못 차리고 사랑에 탐닉하게 된다.

 

당연히 봉기의 칼끝은 무뎌졌다.

 

마침내 반란군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곤혹스런 처지에 빠진 라진은, 결국 비장한 마음으로 공주를 강물에 집어넣고 만다.
공주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스텐카 라진은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차르 황제와 ‘맞장’을 뜨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하지만 1670년 10월, 이들은 심비르스크 근처에서 정부군과 접전을 벌여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

 

더불어 스텐카 라진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카자크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옛 동료들의 배신으로 1671년 4월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됐다.

 

그리고 1671년 6월 16일.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라’는 황제의 특별한 주문에 따라

 

모스크바 광장에서 손과 발과 목이 차례로 잘려나갔다.
그의 죽음으로 러시아 농민들은 절망했다.

 

하지만 곧 스텐카 라진이 처형 직전에 탈출해 어딘가 숨어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한 가닥 희망을 피어 올린 농민들은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면 스텐카 라진을 기다리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부른 노래는 숱한 전설과 함께 러시아 농민의 입에서 입으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다.

 

한편,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물속에 던진 것을 두고, 오늘날의 ‘로맨스

 

중독자’들은 말들이 많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고도 하고, 공주를 익사시킨 영웅의 잔혹함을

 

탓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페르시아 공주가 ‘미인계’를 자초해 지도자의 눈을 흐리게

 

한 첩자였다는 설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물속에 집어 던진 까닭에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2007.11.14 )

 

박남일 자유기고가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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