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기념물

전라남도 기념물 (제257호) 담양 광산김씨 성일·성구 형제 사행비각

오늘의 쉼터 2023. 5. 2. 13:08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57호)
명    칭 담양 광산김씨 성일·성구 형제 사행비각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2022.04.14
소 재 지 전라남도 담양군 향백동1길 69 (담양읍)
시    대 조선시대 (비 1706년 건립, 비각 1862년 이건)
소 유 자 담양군
관 리 자 담양군
일반설명

비각(碑閣)은 비석을 보호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이번에 전남도 기념물 제257호로 지정한 '담양 광산김씨 성일·성구 형제 사행비각'은 광산김씨 성일·성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706년 세운 비를 보호하는 비각이다.

정면칸과 측면칸, 겹처마 맞배집의 비각은 소박함과 절제미가 묻어난다. 1706년 건립 후 1792년 중수를 거쳐 1862년 이건했다. 조선 후기 비각 유형을 충실히 따른 전통 건축물로 지정 가치를 인정받았다.


*형제복수비 
담양읍 향백동 마을 서편 등성이에 노거수(보호수 지정) 두 그루가 있는데 그 밑에 비각이 있고 형제복수비가 서 있다. 백동사거리에서 담양공고 방면으로 가는 큰길에서 왼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언덕의 형제복수비인데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형제복수비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380여년 전, 향백동에 광산김씨 김성일, 김성구 형제가 살고 있었다. 부친 김준민은 36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거제현령을 지내면서 진주성과 달성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분이었다. 그리고 김성일의 숙부 김세민도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그런데, 숙부 김세민이 벼슬에 봉직된 후 잠시 집을 떠나 있는 동안에 노비 금이가 김세민의 아내 예합을 겁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김준민이 대노하여 금이를 엄벌에 처하겠다고 했다. 그 사실을 금이가 미리 알고 자신의 두 동생과 함께 인조7년(1629) 10월 30일 밤에 김준민의 집에 침입해 도끼로 참혹하게 살해하고 김성일의 동생 김성구마저 상처를 입혔다.

이때 김성일은 한성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부음을 듣고 돌아오니 아우 김성구가 피를 토하고 실성해 있었다. 이에 형제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금이를 잡아 죽이기로 복수를 결심, 아버지 장례를 치르지 않고 동정을 살피다가 12월 15일 시장을 배회하던 금이와 그 부모를 잡아 죽이고 간을 도려내어 하인을 시켜 아버지의 빈소 앞에 걸게 하고는 곧 관아에 가서 형제가 자수하고 옥에 갇혀 죽기를 청하였다. 김준민이 죽은 지 45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에 담양부사 이윤우가 추관(推官) 광주목사 임효달과 함께 선대의 원수를 갚는 것은 사형을 면제한다는 것을 인용하여 감사에게 의보(議報)하자 감사 송상인이 조정에 아뢰니, 형조에서는 ‘대명률(大明律)’ 징벌조에 따라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조대왕이 그 효의를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용서하고 예경춘추(禮經春秋)에 복수의 의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두 형제의 효성을 가상히 여기고 비를 세워 “형제복수비”라 칭하였다.

이웃마을 친족들은 성일 형제가 옥에 갇혀있는 동안 김준민의 시신이 아직 묻히지 못한 것을 가엾이 여겨 대신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후 담양 향백동마을은 선친이 살해당한 곳이라 차마 그대로 살지 못하고 형제가 흥덕 부안 등지로 옮겨 살았는데 박두보가 이들 형제가 의인으로 칭송되는지라 자기 집으로 맞이해 살게 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이경여가 다시 형제를 막하에 두고 후하게 대우했고 평성부원군 신경진도 그렇게 하였다 전해진다.

한편, 김성일(金成一)은 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아우인 사호 김성구(金成九)와 같이 아버지의 원수인 종놈 김이란 자를 죽이고 관가에 가서 자수하니 인조임금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특사했다. 성일은 병자호란 때에 군공을 세워 삭주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의 정려를 내렸고 담양에 있는 증암사에 배향되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지은 '형제복수전' 이라는 글도 전해진다 

 

담양 광산김씨 성일·성구 형제 사행비각
담양 광산김씨 성일·성구 형제 사행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