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전남유형문화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

오늘의 쉼터 2017. 6. 3. 10:02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73호 
명 칭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 (和順雲住寺臥形石造如來佛)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2005.07.13
소 재 지전남 화순군  용강리
시 대고려시대
소 유 자운주사
관 리 자운주사

 

설명


운주사(雲住寺) 계곡 정상부에 있는 석불2구로 각각 12.7m, 10.3m의 크기로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누워있는 형태이다. 운주사(雲住寺)를 창건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천불 천탑을 세운 후 와불(臥佛)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새벽닭이 울어 누워있는 형태로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국내의 와불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석불이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좌불 12.7미터, 입상 10.26미터의 대단히 큰 불상이다.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천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운주사(雲住寺)의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한 삼불 신앙의 형태로서 떼어서 어딘가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과연 어디다 세우려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역사의 기록에서 이런 대단위 불사가 사라진 까닭을 생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 조성전설

신라 52대 효공왕 때 영암구림 출신으로 일찍이 큰 지혜로써 도를 깨쳐 그 높은 도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대선사인 도선국사(道詵國師)는 당나라에 들어가 풍수지리학을 배워 처음으로 신라에 전파하였다. 그는 한반도의 형세가 행주형국(行舟形局-태평향을 행해 가는 배의 모양)인데 동해안인 관동지방, 영남지방은 태백산맥으로 산이 높아 무거운데 반해 호서, 호남지방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기울어져 나라가 편안치 못하고 항상 변란이 많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산세를 관찰한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여기에 높은 탑을 많이 세워 돗대로 삼고 부처로써 짐을 많이 실어 놓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천불은 사공이 되어 태평양을 향해 저어가면 풍파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이 같은 생각에서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이곳에 절을 세워 나라를 편안케 하기위하여 사동(使童) 하나를 데리고 와 터를 다듬고, 도력(道力)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그 날 닭이 울기 전까지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든 다음 닭이 울면 천상으로 가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도선 국사는 혹시 시간이 부족해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아무도 모르게 절의 서쪽에 있는 일괘봉(日掛峯)에 해를 잡아 매 놓았다고 한다. 석공들이 열심히 탑과 부처를 만드는 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동(使童) 녀석은 공사바위(절 뒤에 있음)에서 돌을 날라다 주다가 그만 짜증이 났다. 그때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일이 거의 되어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해를 풀어 주었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는 일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석공들은 와불의 마지막 손질을 위해서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때 꾀 많은 사동(使童)은 일에 지치자 그만 닭 우는 소리를 내 지르고 말았다. 석공들은 와불을 다 세우고 절에서 6㎞ 떨어진 하수락 일대의 돌들을 끌어 모아 놓고 일을 마칠 계획이었는데 닭소리가 나자 일손을 멈추고 창고바위에 도구를 모두 넣은 다음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석공들이 모두 천상으로 가버린 뒤에 살펴보니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

화순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