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하늘의 道]

제14장 지극한 정치를 향하여 2

오늘의 쉼터 2016. 8. 6. 15:30

제14장 지극한 정치를 향하여 2



한천의 집으로 가장 늦게 달려온 사람은 양팽손이었다.
 
  그는 퇴청한 후 정광필의 집으로 가 얘기를 나누고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미 모였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남은 사람은 조광조와 한천뿐이었다.
 
  양팽손은 방안에서 상념에 잠겨 있는 조광조를 보고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제 조광조는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유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치를 이루고자 세상 속으로 뛰어든 명재상(名宰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범접하기 어려운 위의(威儀)까지 느껴졌다.

그 위의에는 도학으로 닦은 기품에다 중종의 무한한 신뢰가 배어 있었다.
 
  그의 초고속 승진은 중종의 무한한 신뢰를 잘 말해주었다.

정 6품의 정언에서 2년 만에 종 3품의 전한(典翰)이라는 관직에 올랐는데,

특히 응교(應敎; 정 5품)가 된 지 한 달 만에 두 품계를 건너뛰며 전한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승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전한에서 다시 네 달 만에 정 3품의 직제학이 된 것이었다.

양팽손은 사간원 말석에 있는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정암 형님, 축하드립니다.

전한이 되신 지 네 달 만에 직제학에 오르셨으니 경사가 아닙니까."
 
  "오늘 왔다 간 동지들 모두가 나보다 훌륭한 선비들이오.

축하를 받기가 쑥스럽고 뿌리가 깊지 못하여 웃자라는 나무 같은 느낌이 드오.

거센 바람이 불면 쓰러질지도 모르니 두려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오."
 
  "전하의 총애를 받아 승진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전하께서는 형님의 능력을 보고 하루가 다르게 높은 관직을 주셨을 것입니다."
 
  "학포,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소.

지방외직으로 나가 한가한 시간에 공부를 더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동지들이 모두 경연에 나아가 전하를 진심으로 잘 모시고 있으니 그리 됐으면 좋겠소."
 
  연산주 때 유명무실했던 경연이 다시 강화되어 중종이 조광조 등과 뜻을 함께 하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경연 자리에서는 강의뿐만 아니라 조정의 모든 문제가 거론되었다.

새로 관직에 임용된 벼슬아치의 인품이나 비리, 관청의 온갖 부조리,

백성들의 고달픈 농사 등등 성역 없는 간언(諫言)이 오갔다.
 
  "학포,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이 달에 다시 정언으로 복직된 것을 축하하오."
 
  "복직된 것은 형님 덕분입니다."
 
  "나도 경연에서 거들긴 했지만 이성동 직제학, 민수천 전한, 이성동 대사간, 권발 장령,

김구 헌납 등이 학포를 복직시켜야 한다고 적극 간언한 결과지요."
 
  조광조가 경연에서 이성언은 조정의 정치를 탁란케 한 사람이므로

양팽손이 간사한 자를 미워하고 먼 뒷날을 염려한 것인데

도리어 체직되었다며 다시 복직시키라고 반복해서 아뢰었던 것이다.
 
  양팽손이 한 달 전에 체직당한 것은 이성언이 소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행을 구하고자 상소문을 올렸는데도 대간들이 그 죄를 강력하게 주청하지 않자,

양팽손이 옳지 않은 일이라며 대간 박수문과 김광복을 공격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지치를 하는 데 옳지 못한 제도를 간언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힘썼다.

내수사(內需司)의 부조리를 혁파하는 데도 그랬다.

왕실의 살림살이를 관장하는 내수사는 부조리의 온상이었다.

양인들에게 장리(長利)를 놓아 착취하더니 최근에는 인정사정없는

토지겸병(土地兼倂; 소유토지 확대)으로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도 조광조는 김구와 의견을 자주 나누었다.

양인들에게 가장 크게 해독을 끼치고 있는 내수사 부조리는 김구가 지속적으로 경연에서 말했다.
 
  "내수사는 그 유래가 오래지나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구차스러운 문제들이

속속 생기곤 합니다.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폐단을 제때에 없애야 할 것입니다."
 
  내수사가 소유한 토지는 면세의 혜택을 누렸다.

그리고 내수사의 전답은 대부분 양인들이 경작했는데 수확하는 곡물은 서로 반분했다.

양인들은 서로 내수사전(內需司田)을 경작하려고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전답을

내수사에 바치기도 했다.

내수사전을 경작하면 각종 사역에서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수사의 토지는 저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수사뿐만 아니라 부자나 양반들도 양인들의 전답을 헐값에 사들여

사유 토지를 늘이는 토지겸병이 날로 심해졌다.
 
  경연의 영사 신용개도 이러한 폐단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내수사는 선대임금 때에 설치한 지 오래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없애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폐단은 이미 극도에 달했고, 논의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선대 임금 때 만들었다는 이유로 없애지 못하고 남아 있게 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선대 임금의 좋은 제도는 물론 변함없이 준수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말아야겠지만

이런 문제는 부득이 없애야 할 것입니다.
 
  또한 토지겸병이 정사에 주는 해독이 큽니다.

지금 겸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체로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문제는 실시하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먼저 왕조에서도 실시하려다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끝내 못했고,

우리 태조도 실시하려다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만약 실시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입니다."
 
  김구도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려면 토지제한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김정과 박상이 상소문을 올렸을 때 문책을 주장했다가

조광조의 직언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정승들의 도움을 받아 도승지로 복귀하더니

최근에 경연의 참찬관이 된 이행이 말했다.
 
  "토지를 제한하는 문제는 쉽사리 실시할 수 없습니다.

우선 겸병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행은 역시 왕실과 부자를 옹호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그래서 김구는 즉시 반박하여 말했다.
 
  "토지를 제한한 다음에야 겸병을 없앨 수 있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겸병을 금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차근차근 잘 토의해서 점진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달 기준도 경연에서 김구를 거드는 말을 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구실을 할 수 없으므로 옛날 임금들은

모두 여기에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뒷날의 임금들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농사가 백성들의 운명에 관계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에 패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폐주 이후부터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어렵게 되었습니다.

백성으로서 토지를 가진 자는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설사 한 뙈기 토지를 가진 자라 하더라도

결국은 먹고 살 수도 없어서 살 곳을 잃고 유랑하다가 굶어 죽는 사람의 시체가 널려 있으니

이런 참혹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토지제한이나 토지겸병을 금지하는 일은 왕실과 부자들의 거센 반발로 쉽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왕실과 부자들과의 마찰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내수사 부조리부터 혁파하면 부자나 양반들의 토지겸병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文廟; 공자사당)에 제사지내자고 하는 일도 그랬다.

성균관의 유생 안처겸이 주동이 되어 두 사람을 문묘에 제사지내자는 상소문을 올렸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조광조와 왕래가 있는 성균관 유생 권전이 유생들을 대표하여 또 상소문을 올렸지만 보류되고 말았다.
 
  <신 등이 고찰하건대 도학의 유래는 당요와 우순 때에 처음으로 발생하여 공자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맹자 때에까지 이른 다음 그 후 천여 년 간은 전혀 계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중간에 비록 간혹 약간의 견해를 가지고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결함이 없지 않았으니 도학의 계통을 잇는 것이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실로 송나라 선비인 주렴계로부터 비로소 다시 도학의 시초를 열어놓았고

그것을 천명한 사람은 정명도와 정이천 이었으며 그것을 집대성한 사람은 주자였습니다.

참된 선비가 이때처럼 많이 배출된 적이 없었으므로 도학은 매우 흥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몇몇 군자들은 마침 나쁜 운수를 만나서 제자들과 강론하는 자리에서는

도학을 천명하였지만 자신들은 당시에 곤란을 겪었습니다.

 비방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뭇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그들을 표창하고 높이 내세워

공자사당에서 제사지내게 된 것은 오직 송나라 이종 때에 처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신 등이 일찍이 <송사>를 읽을 때마다 늘 참된 선비들이 장자와 정자 때에 많이 태어났으나

그들을 표창하는 특전은 이종에 의하여 비로소 시작되었다는데 대하여 탄복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 도의 큰 다행입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우리나라 단군의 시기는 아득히 먼 옛날이어서 더는 고증 할 데가 없고

기자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겨우 여덟 가지 조목의 법을 베풀었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으로 유학의 선구자인 정몽주가 고려말기에 태어나게 되었으며

그는 성리학 연구를 깊고 널리 하여 심오한 뜻을 깊이 체득함으로써 옛 선비들과 은연중

합치되었으며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높은 절개는 당대의 사람들을 고무하였습니다.

거상제도를 마련하여 사당을 세우는 것은 전적으로 <가례>에 의거하였으며 제도와 예의 절차는

 다 그가 고쳐 만든 것이고 학교를 세우고 유학을 크게 장려하여 유교를 밝히고 후세사람들의

학문을 계발시킨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 한사람뿐입니다.

학문을 주렴계와 정자들에 비교하면 실로 차등이 있겠지만 공로를 그들과 비교하면 거의 같습니다.

그 뒤로 몇 해 동안 조정과 시골에 이름 있는 선비들로서 내세울 만한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리고 도학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고 남모르게 멀리 몽주의 사업을 잇고 주렴계나 정자가

한 학문의 근원을 깊이 연구한 사람으로서는 김굉필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굉필은 사람이 기질과 국량이 바르고 성품과 품행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성인의 학문에 뜻을 굳게 두고 실천에 힘썼으며 보고 듣거나 말하고 행동할 때에는

언제나 공경스럽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엄숙하게 꿇어앉아 있어도

사람을 접촉할 때면 화기가 돌았던 것입니다. 남을 가르칠 때면 차근차근하게 온갖 성의를 다 보였으며 공부하러 오는 사람에게는 <소학>과 <대학>을 우선으로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규모도 잡히고 절차도 정연하였습니다. 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때때로 고통을 겪었지만

태연히 이겨내면서 공경스럽게 행동하며 공부하는 등 일은 처음과 같이 늦춤이 없이 밤낮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습니다.
 
  그의 제자가 되어 공부한 사람들은 유교의 본질을 들을 수 있었고 그를 한번 만나본 사람은

이 사람의 풍모를 우러러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를 높이 우러러보며 오히려 덕행을 중요하게 여기고

글재주나 피우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정서를 앞세우고 이단을 배척할 줄 알게 된 것과

전하가 착한 것을 좋아하고 나쁜 것을 미워하는 것을 밝히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잘 살피며

규율을 바로잡고 교화를 베풀려고 하는 것은 실로 굉필의 덕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덕을 입은 것으로 말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같지만

이 두 사람의 공로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온 세상에 매우 적습니다.

이것은 바로 전하가 이종의 옛 사적대로 일을 시행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전하가 공경스런 마음으로 어진 사람들을 존대하고 지성으로 학문을 장려하여

운수가 펴지게 하고 도학의 계통을 밝혀야 할 때는 바로 이 시기인데

이 두 선비가 아직 설총, 최치원, 안유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훌륭한 시대에 이보다 더 심한 결함은 없습니다. 풍속을 순박하게 만들고

선비의 기풍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렸는데

신 등은 전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는 한창 젊으신 데다가 정력을 기울여 정사를 잘하려고 애씀으로써

지금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해나가는 교화가 널리 베풀어지고 있는데

이종이 시행한 한 가지 일만을 따르지 못하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이종이 주렴계, 정자, 주자, 장자를 높이고 왕안석을 배척했으니

착한 사람을 좋아할 줄도 알고 악한 사람을 미워할 줄도 아는 장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권세 있고 간사한 자들을 번갈아 등용하여 진덕수와 위료웅과 같은 어진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지 못하였습니다.

어진 사람을 보고도 어진 줄 모르며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고도 어질지 못한 줄 모르는 암둔한 자입니다. 어찌 전하를 위해서 말씀드릴 나위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는 밝은 도량을 넓히고 굳센 결단을 내리어 지시를 발표하고 특별히 승인하여

몽주와 굉필을 공자사당에서 제사지내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영원토록 소중하게 계승해야 할

도학을 밝히는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이름난 선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유교에도

매우 좋은 일이며 선비들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소문을 올린 권전은 심정이나 홍경주 등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조광조와 교우를 나눌 정도였으면 그 인품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그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권전은 조광조의 무리들과 서로 사귈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고 고상한 의논을 하기에 힘쓴 결과 같은 동료 중에서

제일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얼굴이 못생기고 속이 좁고 행동이 부실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간사한 자라는 것을 의심하면서도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연 속 좁고 간사하고 행동이 부실한 사람이었을까.
 
  상소문을 받은 중종은 글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여 정승들에게 참고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글의 내용을 보면 정몽주와 김굉필을 공자사당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영원히 소중하게 계승하야 할 도학을 밝히고자 하니

성균관 유생들의 생각은 아주 훌륭하다. 마땅히 올린 글을 조정에서 의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광필, 신용개 등은 그들을 공자사당에 제사지내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정몽주는 우리나라의 성리학의 선구자입니다.

중앙에 5부 학당을 세우고 지방에 향교를 세운 것은 모두 그가 계획한 것입니다.

그 당시 상례가 몹시 문란하였는데 개인 사당을 짓고 3년상을 지냈으니

그가 유교에 남긴 공적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고려 왕조 왕씨 말기에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람은 오직 정몽주 한 사람뿐입니다.

문묘에서 제사지내도 손색이 없었으나 역대로 내려오면서 외면해버린 것입니다.
 
  김굉필은 학문과 행실이 실하여 당시 젊은이들이 높이 우러러 따랐지만

성인들의 경서에 대한 뜻을 천명하거나 유교에 도움을 주어 나타난 성과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홍문관은 그들을 문묘에 모셔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몽주는 천만년 무지와 몽매로 흘러오던 끝에 뛰어난 인재로 태어나 우리나라 성리학의

근원을 열어놓았습니다.

모든 데 해박한 학식과 임금을 도울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이 충성스러운 학식과 효성스러운 높은 절개와 제도를 마련하고 규정을 정하는 방도가

역사책에 실려 있어서 대략적인 것을 볼 수 있으니 공자사당에 제사지내는 것은

단연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김굉필은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면서도 씩씩하며 재주와 식견이 밝고 민첩한 데다가

젊을 때에 큰 뜻을 가지고 성인들을 따라 배우기에 힘씀으로써 학문은 정밀하고 심오하였으며

훌륭한 도덕이 성취되었습니다.

도학의 계통이 끊어졌던 시기에 결연히 일어나서 당대 선비들의 스승이 되었으니

그가 유교에 남긴 공적은 컸습니다.

 벼슬을 높여주고 시호를 주며 문묘에서 제사지내주기 바랍니다.
 
  정여창도 굉필이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으로서 학문과 재주와 덕행이 대체로 서로 비슷합니다.

벼슬을 높여주고 시호를 주는 것을 굉필이와 대비해서 적당히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김정도 경연 자리에서 신중하자는 대신을 비난하며 아뢰었다.
 
  "대신의 의견은 마치 소인이 군자의 일을 저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몽주를 문묘에서 제사지내는 문제는 단연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김굉필의 높은 도덕은 후배들에게 은연 중 영향을 주었으니

지금 문묘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는 것 역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종은 대신들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문묘에서 제사지내는 일에 대해서는 대신만이 안 된다고 할 뿐 아니라

대간들 역시 곤란하게 여기니 제사지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조광조는 내수사와 문묘 제사 문제로 피곤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찰과 반발이 심한 것이었다.

조정에 일이 생길 때마다 복지부동하는 좌의정 김응기의 교체 역시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간관들이 줄기차게 탄핵했지만 정광필과 신용개가 나서지 않음으로써 중종이 주춤거렸다.

더구나 종묘 제사에 쓸 돼지 한 마리가 사라지는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김응기의 교체 안건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사라진 돼지는 조정을 한동안 시끄럽게 했다.

보름날 제사 제물로 쓸 돼지를 전생서(典牲暑) 관리가 직접 바치지 않고

종들을 시켜 들여왔던 것인데 부주의하여 종묘 안에서 돼지 두 마리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종묘 안을 뒤져 한 마리는 바로 찾았지만 곧 죽어버렸고,

또 한 마리는 어디론가 깊이 숨어 찾지 못했다.
 
  보고를 받은 중종은 전생서 관리와 종들을 즉시 의금부에 가두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의정 정광필도 놀란 채 아뢰었다.
 
  "신 등은 어제 종묘의 보름날 제사에 제물로 쓸 돼지를 놓쳐버렸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태만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변고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
 
  정광필뿐만 아니라 홍문관과 대간에서도 큰 변고로 규정하고 정성과 공경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중종에게 종묘의 제사를 직접 자주 지내도록 간언했다.

어쨌든 이 돼지 한 마리가 도망친 사건으로 인해서 김응기 문제는

또 주요 논박거리에서 밀려나 흐지부지 될 조짐마저 보였던 것이다.
 
  그나마 조광조의 뜻이 관철된 것은 도승지 이행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가 잘못된 인사라고

격렬하게 간언하여 그를 호조참의로 내려 보낸 일이었다.
 
  양팽손은 조광조의 부탁으로 정광필을 찾아가 그의 의중을 탐색해보았으나

도움 될 만한 언질은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학포, 영의정 어른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던가요."
 
  "대간들의 인화를 생각해서 부득이하게 저를 체직하도록 전하에게 아뢨다며 사과를 했습니다.

사실일 것입니다. 본의와 다르게 그런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김응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요."
 
  "지방의 인심과 풍속이 날로 야박해지고 재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정승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어 그렇다며 영의정 어른도 김응기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종묘에 두 어른을 모시는 일도 언질이 없습니까."
 
  "그 일은 전날이나 지금이나 오직 신중할 뿐이었습니다."
 
  정광필은 기개 있는 양팽손을 아끼고 신뢰했다.

그래서 조광조는 양팽손을 정광필에게 보냈던 것인데,

역시 시원한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조광조는 문득 지방외직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포, 빠른 승진이 기쁘기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두렵기도 하오.

잠시 중앙 관직을 떠나 궁벽한 고을을 5,6년쯤 맡아 한가한 시간에는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소.

학포의 고향 능주도 좋겠지요. 공부를 더한 후 전하가 불러주시면 더 잘 모실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나 중종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은 조광조가 전면에 나설 때가 아니라고 보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승과 판서들이 버티고 있으므로 잘못 나섰다가는

스스로 몰락을 자초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무한히 신뢰하면서도 그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뜻을 펼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신진들을 많이 등용시키는 일이었다.
 
  며칠 후.


  중종은 조광조를 위한 인사를 단행했다.

정축년 12월 26일이었다.

홍문관은 이미 조광조의 동지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번 인사에서는 의정부와 승정원에 조광조의 사람을 심는 일이었다.

우참찬 최숙생, 동부승지 문근이 바로 그들이었다.

사간원에 이청을 헌납으로, 이희민을 저작(著作)으로 임명했다.

사헌부에는 이미 대사헌으로 윤세호가, 권벌이 장령으로 있으니

양사가 모두 조광조의 사람들로 채워지는 셈이었다.
 
  무인년 1월 5일 인사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의중을 드러냈다.

조광조를 부제학에다 경연의 참찬관(정 3품)과 춘추관의 수찬관을 겸직시키는 인사 발령을 냈다.

이때 이조판서 남곤의 영향력은 초라할 정도가 돼버렸다.

남곤은 부제학 후보를 손주(孫澍), 조광조 순으로 올렸던 것인데

중종은 조광조를 선택했다.

남곤은 또 이조정랑 한충의 반대를 무릅쓰고 충청도 관찰사로 이행을 추천했는데

중종은 이행을 병조참지로 내려 보내버렸다.

뿐만 아니라 남곤은 신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권균(權均), 홍경주, 장순손을

우찬성 후보로 올렸지만 이 또한 중종은 조광조의 사람인 이계맹(李繼孟)으로 낙점했다.

 이와 같은 중종의 인사는 조광조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