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하늘의 道]

제8장 새 세상의 아침 3

오늘의 쉼터 2016. 7. 31. 13:00

제8장 새 세상의 아침 3



표주박 같은 상현달이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크고 작은 별들도 달을 중심으로 밝게 빛났다.

며칠 동안 안개가 끼어 밤하늘이 흐릿했었는데,

모처럼 나타난 별들이 또록또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피를 부른 반정의 회오리바람이 가시고 새로운 세상의 앞날을 예고하듯

운명을 점지하는 별자리의 별들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중종은 며칠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전을 나온 중종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지밀내시 정언경이 등 뒤에서 밤기운이 차가우니

침전에 들라고 하지만 중종은 고개를 저으며 서성거렸다.

  "마마, 밤이슬이 차가우니 어서 침전으로 듭시옵소서."

  "사저로 간 중전은 잘 있는지 소식은 없느냐."

  "이미 죽동궁으로 가 계신다 하옵니다."

  죽동궁은 폐비 신씨의 사저를 말했다.

신씨의 사저는 신씨가 대궐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인왕산 기슭에 있었다.

  "알았다. 너는 저 별들을 보니 무슨 생각이 드느냐."

  "마마, 해와 달이 마마라면 별들은 백성이 아니겠사옵니까.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을 보니

온 백성이 마마께서 왕위에 오른 것을 감축드리는 것 같사옵니다."

  "너는 그렇게 보이느냐."

  "그렇사옵니다."

  "허나 나는 그렇지 않구나. 저 별들이 어찌 저리 슬피 보이느냐.

마치 짝을 잃은 새끼들의 눈동자처럼 슬퍼 보이는구나."

  "마마, 근심을 버리시옵소서. 옥체를 상하시면 큰일이옵니다."

  "유배를 간 형님이 강화도 교동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도다."

  "마마, 성후(聖侯; 임금의 건강)를 살피소서.

마마께서는 형제간의 도리를 다하시지 않았사옵니까. 하오니 옥체를 보존하소서."

  "너는 내가 형제간의 도리를 다했다고 보느냐."

  "신하를 시켜 맛있는 음식을 보내시고 차가운 날씨를 걱정하여 털옷을 보내지 않았사옵니까.

또한 마당이 좁다고 가시울타리를 넓혀주지 않았사옵니까.

대궐의 내시와 상궁들이 마마의 마음씨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사옵니다."

  "그런 일인들 무엇이 어렵겠느냐.

아마도 형님이 잃은 것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형수일 것이니라."

  "세상이 형님에게 등을 돌렸으나 마마께서는 형제간의 의리를 끊지 않고 있사옵니다.

마마의 성덕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중종은 배다른 형인 연산군의 건강을 걱정하며 임금이기 이전에 동생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있었다.

반정 공신들은 그러한 중종이 못마땅했지만 차마 형제간의 의리까지는 끊으라고 강요하지 못했다.

  "마마, 근심을 놓아버리시옵소서. 근심은 성후를 해치기 마련이옵니다."

  "너라면 상심하지 않겠느냐."

  지밀내시 정언경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중종의 깊은 고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른 지 이틀 만에 사저로 쫓겨 간 부인 신씨를 생각하며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중종은 정승 중에서도 좌참찬 박원종을 보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견딜 수 없었다.

정사를 펴는 대궐에서도 가능하면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잠깐 동안이라도 말하기를 꺼려했다.

  박원종과 의견이 맞아떨어졌던 것은 반정의 공신을 정하는 일뿐이었다.

서로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으로 갈등을 피했다.

박원종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반정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공을 주려 했고,

중종은 왕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반정과 상관이 없는 인물이지만 자신과 가까웠던 몇 사람을

천거하여 공신대장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과 반정의 공신들 간에 밀월은 단 하루뿐이었다.

불과 하루가 지나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반정의 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인 왕비 신씨가 두려워졌다.

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신수근을 반정 전날 밤에 신윤무를 보내 죽였으므로

왕비 신씨의 복수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짜낸 계책이 왕비 신씨를 대궐에서 내쫓는 일이었다.

죄인의 딸이라고 몰아붙인 뒤 서인으로 폐위시키고자 했다.

  중종이 며칠째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반정이 성공한 다음날, 박원종의 사주를 받은 반정의 공신들인 정승과 육조판서들이

돌아가며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뢨던 것이다.

  "의거하던 때 먼저 신수근을 죽인 것은 큰일에 성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딸이 궁중에 들어와 있는데, 만일 그를 왕비로 정하게 되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이 생길 것입니다.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이 생기면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일이 있을 터이오니,

은정(恩情)을 끊고 내보내소서."

  그러나 중종은 정승과 판서들을 보지 않고 허공을 향해 말했다.

  "큰일을 위해서라고 하니 장인의 죽음까지 거론하지는 않겠소만

중전이 무슨 잘못이 있다는 것이오."

  "전하 곁에 신수근의 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흩어진 신수근의 세력이

다시 힘을 모아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 자신이 없습니까.

어제는 과인이 박원종과 유자광의 제의를 받아들여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헌데도 뭐가 그리 위태롭고 의혹이 생긴다는 것이오."

  그들의 제의란 신수근의 4촌과 5촌 및 이종 3촌 4촌까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어 거주제한을 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역시도 신수근의 세력이 다시 뭉쳐질 것을 염려한 조치였다.

중종은 이 제의는 명분이 있으므로 허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신씨의 폐위 문제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결국 반정의 정승들과 육조판서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날 중종은 일찍 침전에 들었으나 신씨를 바로보지 못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왕비로 책봉된 신씨는 하루가 지났으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침전에 든 중종을 덤덤하게 맞아들였지만 바싹 마른 중종의 입술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안해 졌다.

  "전하, 어인 일로 일찍 듭시었습니까."

  "중전, 미안하오."

  "저보고 중전이라 했습니까.

왕비 책봉을 받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사옵니다.

하오니 저는 예전처럼 부인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아니오. 나는 중전이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소.

내가 임금에 오르기까지는 중전의 지혜가 큰 힘이 됐었소.

나는 중전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오."

  "전하, 왕실의 법도를 지켜야 하는 것을 모르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옵니다.

저는 아직도 왕비가 된 것이 실감나지 않사옵니다."
   
  "허허."


  중종은 신씨가 완강하게 중전이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하자,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중전, 장인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오."

  "인명재천이라 했사옵니다.

아비의 목숨을 하늘이 그것밖에 허락하지 않았으니 전하인들 어찌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이 원망스럽구려."

  "하늘을 원망한들 무엇이 바꿔지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성군이 되신다면 아비의 죽음도 헛되지 않을 날이 올 것이옵니다."

  "진정, 그리 생각하시는 것이오."

  "아비가 걸림돌이라 하여 반정의 공신들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의 뜻대로 되었고, 전하께서는 보위를 잇게 되었사옵니다."

  "과연, 중전은 참으로 현명하시오. 중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날 자결하고 말았을 것이오."

  반정하던 날, 군사가 자신의 사저를 에워싸자 진성대군(중종)이 놀라 자결하려고 했을 때였다.

부인 신씨가 칼을 잡은 진성대군의 팔목을 잡으며 '군사의 말 머리가 이 집으로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리까.

하오나 만일 말꼬리가 이 집으로 향하고, 말머리가 밖으로 향해 섰다면 반드시 사저를

호위하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고 만류했던 것이다.

  초저녁 이경을 알리는 경고(更鼓)가 울려왔다.

북소리가 그치고 나자 지밀내시 정언경이 "박원종 대감이 전하를 독대하고자 하옵니다"

하고 알려왔다.

내시의 말을 듣자마자 중종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짓더니 턱을 떨었다.

왕비 신씨가 소스라칠 만큼 중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중종의 대답이 없자 지밀내시가 다시 밖의 소식을 알려왔다.

신씨가 중종의 손을 가만히 쥐어주고 난 뒤에야 중종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박원종에게 내일 정전으로 들라 일러라."

  "중한 일이라 하옵니다. 한시가 급하다 하옵니다."

  신씨가 중종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전하, 무엇이 두렵사옵니까.

전하는 이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신하는 신하일 뿐입니다.

하오니 당당하게 일을 처리하소서."

  "중전의 말이 옳소.

박원종의 군력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나보다 크겠소.

중전의 말대로 그는 나의 신하일 뿐이오."

  중종이 태도를 바꾸어 근엄한 목소리로 지밀내시에게 지시했다.

  "알겠다. 정전으로 나가겠다고 입직승지에게 일러라."

  "전하, 박 대감이 전하를 급히 찾는 것을 보니

촌음을 다투는 조정의 중대한 일인 듯싶사옵니다.

하오니 내일로 미루지 말고 만나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난 알고 있소. 박 대감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조정의 중대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미안하오. 중전."

  "전하. 저에 관한 일이옵니까."

  "그렇소. 왕위를 잇게 보좌한 중전을 공신대장에 올리지 못한 것도 미안한 일인데."

  신씨의 태도는 의외로 냉정했다.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전하, 낮에 최 상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었사옵니다.

그 일이 급류 같이 달려들어 저도 잠시 허둥대었사옵니다.

하오나 전하, 때로는 물러설 줄도 아는 것이 이기는 것이옵니다.

전하, 물러날 때는 머뭇거리지 마시옵소서."

  "중전!"

  중종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신씨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듯 오히려 중종을 위로했다.

  "전하, 전하께서 괴로워하는 것에 비하면 저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옵니다.

박 대감이 저를 대궐에서 내쫓겠다고 하면 그리하라고 하십시오.

이제 전하께서는 한 나라를 이끄시는 임금이시옵니다.

결코 사사로운 정에 끌려 다니는 나약한 모습을 반정의 공신들에게 보이지 마시옵소서."

  "아무런 죄도 없는 중전을 내쫓는 것이 어찌 임금의 일이란 말이오."

  "전하께서는 저를 내쫓는 것이 아니옵니다.

반정의 공신들이 저를 내쫓는 것이옵니다.

전하의 마음속에 있는 저는 내쫓기는 것이 아니옵니다."

  "중전, 나는 중전을 잊지 않을 것이오.

중전이 어디를 가 있든 나는 중전을 잊지 않을 것이오."

  "전하, 저에게 약속할 수 있겠사옵니까."

  "무슨 약속이든 하겠소. 어서 말해 보시오."

  "저를 대궐 밖으로 내보내시되 인왕산 기슭에 있는 사저로 보내 주시옵고,

더 이상 남은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마시옵고, 훗날 왕비로 다시 복위시켜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사옵니다."

  "사저로 가겠다고 했습니까.

그곳에서는 대궐이 내려다보일 터인데 중전의 마음이 더 아프지 않겠소."

  "아니옵니다.

날마다 대궐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 전하를 뵙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

어느 날 인왕산 병풍바위에 저의 치마저고리가 혹시 보이기라도 하면 저인 듯 여기시옵소서."

  지밀내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중종은 마지못해 침전을 나갔다.

이미 정전 차비문 밖에는 입직승지들이 나와 중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원종은 입직승지들이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낮에 반정 공신들이 왕비를 폐위시키는 일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입직승지들에게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했다.

박원종의 얼굴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중종은 박원종이 원한 대로 처음으로 독대를 허락했다.

박원종은 주위에 아무도 없자, 예를 다하지 않고 중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조금 숙이는 시늉만 한 채 말했다.

  "전하, 낮에 정승들이 제의한 것을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사옵니까."

  "평성군은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이오.

더구나 왕비는 과인에게 조강지처가 아니오.

평성군은 나 같은 경우라면 어찌 하겠소."

  "전하께서 물으시니 대답하겠사옵니다."

  "말해 보시오."

  "신은 폐비시키겠사옵니다."

  박원종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중종은 등골이 오싹하는 살기를 느꼈다.

그러나 이미 신씨와 각오한 바가 있었으므로 낮보다는 덜 위축되었다.

  "젊어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조강지처라도 그리하겠다는 것이오."

  "종사(宗社)의 큰일을 두고 어찌하겠사옵니까."

  "종묘사직도 사람의 도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소.

부부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고서 어찌 종묘사직을 논하겠소."

  박원종은 성격이 급했다.

그가 중종과 독대한 것은 타협보다는 자신의 뜻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고자 함이었다.

박원종은 중종 앞인데도 관복 속에 갑옷을 껴입고 있었다.

갑옷이 관복 밖으로 삐어져 나와 그것만으로도 중종에게는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박원종은 중종을 다그치듯 말했다.

  "쾌히 결단하여 미루지 마소서."

  순간, 중종은 '물러설 줄 아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신씨의 말이 떠올랐다.

중종은 박원종이 원하는 대로 허락했다.

  "종묘사직이 지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겠는가. 마땅히 중의(衆議)를 좇으리라."

  박원종에게 굴복했다기보다는 조정 대신들의 중의를 따르겠다는 명분을 찾아 폐위를 허락하고 말았다.

  "전하, 폐비를 어디로 보낼 것이옵니까."

  "평성군, 지금 이 시각에 왕비를 보내란 말이오."

  "전하,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사옵니까.

더구나 대낮보다는 캄캄한 밤이 폐비가 움직이기 좋을 것이옵니다."

  "알겠소. 오늘밤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집에 머물게 할 것이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박원종은 차비문을 나서면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정승과 육조판서들이 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낸 것에 대한 성취감으로 쿵쿵 소리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위세에 눌린 입직승지들은 그가 사라지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있다가

한참 후에 혀를 내두르며 도리질을 했다.

  그러나 중종은 박원종을 독대하고 난 뒤, 허탈감에 빠져 침전으로 가지 못했다.

신씨가 대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날부터 중종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전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더구나 신씨가 사저인 죽동궁(竹洞宮)으로 옮겼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인왕산 병풍바위에는 신씨의 치마가 걸리지 않고 있었다.
 
  중종은 소리가 날 만큼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지밀내시 정언경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옥체를 상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마마, 침전에 듭셔야 하옵니다."

  "네 이름이 뭐라 했던고."

  "정언경이라 하옵니다."

  "그래, 정언경이라 했지. 넌 왜 내시가 됐느냐."

  "집안이 어려워 상선 김처선의 추천으로 대궐에 들어왔사옵니다."

  "너도 거세를 했겠지."

  "어릴 적에 사나운 개에게 물려 저절로 거세가 됐나이다."

  "그렇다면 여자를 모르겠구나."

  "여자라면 어미밖에 모르옵니다."

  "여자를 모르는 네가 차라리 행복하겠구나."

  "마마."

  "나를 보아라. 애정이 두터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부부의 정분이 두터운 것이 오히려 괴로움의 근원이 되고 있지 않느냐.

과인의 이 괴로움을 이 세상 어느 누가 알겠느냐.

그래서 나는 여자를 모르는 네가 부러운 것이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눈물이 나오는구나,

언경아. 인왕산 산기슭에는 중전이 살고 있느니라.

또한 인왕산에는 병풍바위가 있느니라."

  "마마, 병풍바위를 알고 있사옵니다."

  "잘됐구나. 날마다 병풍바위를 보거라.

병풍바위에 치마저고리가 보이거든 나에게 알리거라.

중전의 치마저고리가 어찌 된 일인지 아직 보이지 않는구나."

  "알겠사옵니다."

  그러나 인왕산 병풍바위에 신씨의 치마저고리는 끝내 걸리지 않았다.

중종은 시간을 내어 병풍바위가 잘 보이는 경회루로 나아가 인왕산을 보지만

신씨의 치마저고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씨가 대궐에서 내쫓긴 지 몇 달 만이었다.

지밀내시 정언경이 신씨의 붉은 치마를 보고는 중종에게 달려가 아뢰었다.

  "전하, 중전마마의 치마저고리를 보았사옵니다."

  그러나 중종은 병풍바위에 걸린 신씨의 치마저고리를 며칠간은 보았으나 서서히 잊어먹고 말았다.

신씨를 잊게 하고자 정승들이 돌아가며 새로운 왕비 책봉을 청하였고,

예조판서 송일(宋軼)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신씨가 이미 나갔으니 처녀를 뽑아 궁중의 여직(女職)을 갖추게 하고

또 중궁(中宮) 책봉하는 일도 빨리 거행하소서."

  마침내 중종은 박원종이 다시 왕비 책봉을 청하므로 윤여필(尹汝弼)의 딸 윤숙원을 왕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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