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276. 첫사랑(5)

오늘의 쉼터 2014. 8. 17. 19:48

276. 첫사랑(5)

 

 

 

 

 

(1147) 첫사랑-9

 

더블베드는 셋이 나란히 누웠는데도 넉넉했다.

 

밤 12시반, 셋은 모두 가운 차림이었고 두 여자는 단정하게 가슴까지 여민데다

 

안에는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다 입었다.

 

거기에다 TV를 끄고 방안의 불은 환하게 밝혀놓아서 이야기에 집중할 환경도 조성되었다.

조철봉은 좌우에 얌전히 누운 윤희와 리엔을 보고는 얼굴을 펴고 웃었다.

 

두 여자 한테서는 이제 같은 비누냄새가 맡아졌는데

 

그것이 화장실 비누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 먼저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지.”

베개 위에 팔을 베고 누운 조철봉이 천장을 향하고 말했다.

“옛날 옛적에.”

그러자 흐득 웃은 윤희가 중국어로 통역했다.

 

목소리가 밝고 맑다.

“16년전인데 말야,

 

난 그것이 첫사랑이라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아,

 

그냥 여자하고 첫 경험이었다.”

조철봉이 또박또박 말했고 윤희도 차분하게 중국어로 통역했다.

 

통역하는 동안 조철봉은 다음 말을 정리할 여유가 만들어져서 이야기가 조리있게 진행되었다.

 

임질 걸렸다는 내용만 빼고 만들어진 첫사랑 이야기는 그런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여관방에서 하체를 붙여오는 고영민에게 점잖게 타이르는 장면은

 

두여자한테 감동을 준것 같았다.

 

통역하는 윤희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고 리엔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었다.

 

조철봉의 이야기가 끝났을때 윤희가 긴 숨을 뱉으며 말했다.

“아름다워요. 사장님.”

“그래?”

그때 리엔이 중국어로 말했고 윤희가 통역했다.

“리엔은 울고 싶대요. 그리고 그 여자가 나쁘다고 하네요.”

“으음.”

“그 여자분은 지금 잘 살고 있나요?”

하고 윤희가 물었으므로 조철봉도 긴 숨을 뱉고는 말했다.

“지금 아이하고 둘이 살고 있는데 말야.”

조철봉은 고영민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나서 물었다.

“너희들이 그 여자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니? 내가 나타나면 놀라겠지?”

“그럼요.”

윤희가 대뜸 대답하더니 리엔의 의견을 묻고 통역했다.

“리엔은 부끄러워서 도망갈거라고 하네요.”

“그럴까?”

“아마 저도 그럴걸요?”

“내 도움을 받을까?”

“배신한 옛 남자의 도움을요?”

그렇게 되물었던 윤희가 리엔에게 묻더니 통역해주었다.

“리엔은 그런 여자는 도움을 받을것 같다고 하네요.”

“뭐?”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뜨자 리엔에게 다시 물었던 윤희가 또박또박 말했다.

“리엔은 그런 여자면 틀림없이 사장님의 도움을 받을거라고 하네요.

 

그 여자가 돈 많은 남자한테 갔다면서요?”

“그렇지.”

“리엔은 그렇지만 저는.”

“넌 어떻게 생각해?”

“저는.”

조철봉에게서 시선을 뗀 윤희가 낮게 말했다.

“사장님이 그 여자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지 않을까요?”

“……”

“지금 도움을 줘서 두분이 다시 전처럼 될수가 있을까요?”

맞는 말이다.

 

전처럼 되다니 택도 없다.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1148) 첫사랑-10

 

이제 고영민은 새로운 아파트 주인을 만나 월세 보증금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집을 비워야 할 날은 일주일 후로 다가왔고 그날 조철봉은 고영민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집 주인이 조철봉이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천장을 바라보며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말야.”

최갑중에게도 이런 말은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하겠는가?

 

정신나간 놈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혼자 삭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연 아닌가?

 

임질 때문에 어긋난 사랑을 한번 만회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노소장단(老小長短)을 막론하고 미추(美醜)를 불문하며 귀천(貴賤)에 상관없이

 

숱한 여자와 관계를 가졌으나 천하의 조철봉이 이게 무슨 꼴인가?

 

첫사랑에 맺힌 원한은 풀어야 되지 않겠는가?

 

높은 곳에 두고 빛내 주겠다고 연설을 하고 난 아침에 약국으로 달려가 테라마이신을 사먹다니,

 

16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떠올리면 머리끝이 곤두서고 얼굴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뜬금없는

 

말을 뱉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오늘이 며칠이야?’라든가 ‘아, 허무하고만’이라든가 등인데

 

지난 번에 고영민을 보았을 때도 그렇게 헛소리를 한번 했다.

그때 리엔이 중국어로 상당히 길게 말을 했으므로 조철봉의 시선이 옮겨졌다.

 

리엔의 말이 끝났을 때 윤희가 통역했다.

“리엔은 19세 때 첫사랑을 했는데 그 남자하고 1년반을 사귀었지만 손만 잡았다고 하네요.”

“흐응.”

호기심이 난 조철봉이 상반신을 조금 일으켰고 리엔의 말이 이어졌다.

 

새가 재잘거리는 것 같다.

“그리고 작년에 그 남자하고 멀어졌다네요.

 

남자가 우유부단하고 장래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래요.”

“그래?”

다시 리엔이 재잘거리고 나서 윤희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립대요. 외로울 때는 자주 생각이 난대요.”

“저 중국 기집애가 일부러 내 비위 맞추려고 그러는 거 아냐?”

조철봉이 한국어로 묻자 윤희가 풀썩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 이야기를 꾸며낼 만큼 세파를 겪은 애는 아녜요.”

“그런가?”

“리엔이 아까 그런 때는 부끄러워서 도망 갈 것 같다고 한 것은

 

저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고 말한 것이군요.”

“그렇군.”

“제 생각은 변함 없어요.

 

사장님은 그 여자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응,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윤희의 말을 가볍게 자른 조철봉은 천장을 향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자 좌우의 두 여자,

 

두 민족의 아가씨도 같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덮였다.

 

현재 빈곤한 사람은 과거의 빈곤했던 시절을 떠올려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법이다.

 

계속 빈곤한데 기를 쓰고 꺼낼 기력도 없는 것이다.

 

지금 살만 하니까 옛날에 못살았던 추억을 꺼내 이야깃거리로 삼는 것이 아닌가?

 

지금 첫사랑을 떠벌리는 조철봉의 심사가 바로 그렇다.

 

보라, 어려웠던 시절은 잊고 두 여자를 옆에 눕히고는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임질 이야기는 죽어도 발설하지 않은 채 첫사랑 이야기는 점점 시적(詩的)으로 발전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들은 조언을 품고 고영민에게 한걸음씩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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